<세계화이제는실천이다>4.소아병적인 보도자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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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무슨 제보 전화였습니까.』 『이태원 파출소예요.외국인이 한국사람과 택시 안에서 싸움을 벌였다고 알려주는군요.』 「나이트라이더 파이낸셜 뉴스」(월 스트리트 저널의 모기업이 운영하는 경제 통신)의 서울 특파원 제이슨 부스(29)는 前 직장인 한국의 某신문사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편집국에서 주고 받았던 대화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게 기사가 됩니까.』 『외국인과 싸웠잖아요.』 다음날 그는 국내 뉴스난에 실린「외국인이 택시안에서 노인을 때렸다」는 기사를 보았다.
한국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로버트 켈리(40)도 한국 언론의「애국심」에 혀를 내두르는 사람중 하나다.지난 6월10일 교포학생이 미국학생으로 둔갑한 기사를 본 그는 해당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항의했지만 어처구니 없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미국학생이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다 잡혔다」는 제목이 붙어있지만 기사를 보면 오클라호마大에 다니는 한국 교포 학생이 저지른 일이더군요.어떻게 이런 제목을 내보낼 수 있습니까.』 『기사의 요점은 그게 아닙니다.오렌지족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요점이 어떻든 도대체 왜 이런 제목을달았습니까.』 『편집상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해서요.』 만일 외국 언론에 위의 두가지 사례가 보도된다면 이는 그야말로 생생한기사가 된다.한국 언론이 과연 어떤 일에 민감하고 어디에 둔감한 지를 사실대로 보여주는 것 만으로도 한국의「세계화 수준」을얼마든지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애국」에 민감하고「부정확」에 둔감한 한국의 언론-.
「정서」에 예민하고 「논리」에 무딘 국제사회의 변방(邊方)언론-. 사회의 신경망(神經網)으로 독자를 대신해 세계를 보고 미래를 향해 열려있어야 하며,국내외의 명확한 구분이 엷어져가는지구촌의 정보를 순간 순간 따라가며 추리고 다듬어 사회의 중추(中樞)에 전달해야 하는 언론도 결국 그 사회의 수준 ,독자의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朴長羲기자〉 그러나 언론이 먼저 바뀌지 않고는 국제화든 세계화든 우리 사회의 변신을 위한 촉매(觸媒)작용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난해의 우루과이라운드(UR),올해의 北-美회담에 대한한국 언론 보도의 스크랩북을 다시 펴보면 언론이 어떻게 그같은촉매작용을 했는지 알 수 있다.
『UR를 다루는 한국 언론은 이상하다.그렇게 중요한 문제라면왜 그동안 잠잠했는가.정부가 무엇하고 있었느냐고 비판하지만 언론부터 UR에 무관심하지 않았던가.또 쌀 개방을 포함해 UR의득실을 차분히 따져 보는 언론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당시 일본경제신문 아시아부 차장 스즈오키 다카부미(40.鈴置高史)의눈에 비친 한국 언론의 모습이다.
무슨 일이 터지면 우르르 몰렸다 금방 다음 일이 터지면 잊고마는 한국 언론의「들쥐 속성」도 아울러 짚여지는 대목이다.
한국 언론의 민감함과 둔감함에 당황하는 독자는 외국인만이 아니다. 『하도 작문이 많아 아예 오보(誤報) 리스트를 만들어 공개할까도 생각했다.』 北-美회담을 줄곧 다뤄 온 한 외무부 당국자의 최근 언급이다.
예의「애국적」인 언론이 북한 관계 보도경쟁에서는 웬일인지 별로 애국심을 발휘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국내 외국계 은행의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는 H(41)씨는 외국 회사에서 발생한 노사분규라면 유난히 기사가 커지는 것을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나아가 그는 국내언론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해외 뉴스의 양이 너무 적다는데 대해서도 아쉬움을 갖고 있다.
실제로 한국언론연구원 김택환(金宅煥.35)연구위원이 지난 1월9~15일까지 국내 3대 일간지와 뉴욕타임스.아사히등 외국 4개 신문에 보도된 국제기사의 양을 비교한 바에 따르면 외지(外紙)들이 국내 신문에 비해 두배 이상의 국제 뉴 스를 싣고 있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노재봉(盧在鳳)의원의 뼈아픈 지적까지 곁들여지면 우리 언론이 다루는 국제 뉴스의 양과 질을 다가늠해볼 수 있다.
『우리 언론이 국제 뉴스를 다룬다고 하지만 직접 취재하는 것은 거의 없다.다른 사람이 취재해 보도한 내용을 베껴 옮기거나돈 주고 사오는 것이 고작이다.그러니 늦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언론의 비판기능이 우선 자기 자신부터 대상으로 삼을 때,그리하여 지구촌의「시골 신문」티를 벗을 때 국제화나 세계화를 선도하는 언론은 비로소 출현할 수 있다.
『언론의 수준도 국민일반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국민수준 문제란 결국 현재의 독자들 수준과 언론매체시장 구조를가지고는「좋은」매체를 가려내기에 한계가 있다는 의미와 같다.따라서 정부의 힘에 의하지 않고 시장경쟁의 힘에 의한 평가체제가작동하게 하려면 현재의 언론매체시장 구조를 획기적으로,보다 경쟁적인 구조로 개선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화 팀장 좌승희(左承喜)선임연구위원이 최근 작성한「한국의 국제화를 위한 과제와 대책」중「언론의 국제화」부분에 나오는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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