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과주말을] 엄마 코끼리와 생이별 "동물보호법, 미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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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모기나라에 간 코끼리
아르토 파릴린나 지음, 진일상 옮김, 솔, 288쪽, 9500원
 

도박·오락 등의 목적으로 동물에 상해를 입히는 행위를 금지하는 개정 동물보호법이 내년부터 시행돼 소싸움축제 개최가 불투명해졌단다. 소싸움 축제가 사라지면 싸움소들은 행복해질까.
 
1986년 추운 북유럽 핀란드에서 태어난 코끼리 에밀리아는 갓난쟁이 때 이런 상황에 처했다. 유럽연합의 야생동물 보호법이 발효돼 동물 서커스가 중지되면서다. 가혹행위에 노출될 우려가 없으니 얼마나 행복하겠냐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선 엄마와 생이별했다. 서커스에 능한 엄마 코끼리는 해외 서커스단으로 팔려갔지만, 아직 재주를 배우지 못한 에밀리아는 새 주인을 찾지 못해서다. 그래도 무참히 도살된 늙은 코끼리들보단 운이 좋았다. 동물 서커스 여주인공을 꿈꾸었으나 새 법률 때문에 포기할 처지에 놓인 풋내기 사육사 루치아가 에밀리아를 지키기로 마음 먹기 때문이다.

루치아가 워낙 매력적인 여성이라 어딜 가나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남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게 다행이랄까. 이들은 러시아까지 오가며 작은 공연을 해 살아간다. 그러나 1996년 동물보호법이 더 강화돼 그마저 불가능해진다. 결국 에밀리아를 아프리카에 보내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다.

핀란드를 가로질러 선착장까지 가는 길에서 이들은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난다. 공장이 문 닫은 뒤 온 주민이 술독에 빠진 동네, 동물보호란 본연의 목적 보다는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리겠다는 한 건 주의에 빠져 에밀리아를 루치아로부터 구하려 드는 녹색당 당원들, 주정뱅이 남편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하는 농부의 아내 등 어딘가 모자라고 상처받은 인물들이다. 하지만 작가는 유머러스하고 경쾌한 필치로 이들을 그려나간다. 같은 이야기를 놓고도 눈물 쥐어짜도록 쓸 작가도 분명 있을 텐데 말이다. “인생, 별 거 있나”란 투로 아이러니한 현실을 그리는 작가의 펜 끝엔 기본적으로 인간과 생명에 대한 따뜻한 온기가 배어 있다. ‘블랙 유머’라지만 ‘썩소(썩은 미소)’가 아닌 따뜻한 미소가 절로 나오게 한다.
 
순박한 시골 인심과 자연의 정취가 그리운 이들, 시련 앞에서도 웃을 수 있는 유머감각이 필요한 이들, 사소한 정책 하나가 소시민들의 삶을 얼마나 큰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지 알아야 할 정책입안자들이 읽으면 좋겠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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