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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파행처리된 예산案-정치파괴의 악순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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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예산안을 변칙(變則)처리하고난 뒤 여야가 몸싸움을 벌이는 스산한 국회가,그리고 국회에서 농성하는 시늉을 하다 곧바로 달려간 야당의 장외(場外)집회가「정치파괴(政治破壞)」의 황량한 현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민주주의는 항용(恒用)절차(節次)의 정치로 불린다.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이익과 주의 주장을 가지고 다투고 논쟁하고 그러다가 협상해내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의 정치는 바로 그 과정을 철저히 무시함으로써 정치 그 자체 를 원초적으로 파괴해버리는 현상을 항상 자초하고 만다.예산안 심의와 12.12장외투쟁이 바로 그런 우리 정치의 가장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수준을 적나라하게 다시 한번 드러냈다.
우리는 그동안 이번 국회의 마무리 과정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기대했다.그것은 이 국회가 우리의 내년 나라살림을 꾸려갈 예산안을 심의하기 때문만이 아니다.지금 온나라가 들끓고 있는「세금도둑」사건이,12.12사건을「군사반란」으로 규정하 고는 기소하지 않은 검찰의 행위가,그리고 성수대교 붕괴등 부실 건설공사 사건들이 국회안에서 심도있게 다뤄지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당은 12.12 기소보류가 철회되지 않으면 국회로 들어갈 수 없다고 엉뚱하게 등원 거부를 선언하더니 장외로 달려감으로써 이 모든 기대와 책임을 사실상 저버렸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강경투쟁인 듯 하지만 사실상 따지고 보면정치의 거부이고 무책임의 노출이다.물론 야당이 여당측의 말대로모든 것을 점잖게 법대로 표결처리만 한다면 야당은 무력(無力)해질 것이다.야당의 존재 이유도,소수의견(少數 意見)의 반영수단도 없어질 것이다.그러나 지연전술도 있고 필리버스터(議事妨害)도 할 수 있다.합리적인 논쟁을 통해 누가 뭐래도 여당 주장이 말이 안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해야 한다.그런 점에서 야당이 「12.12」를 들고 나온 것은 성공적이었다.12.12주모자를 기소하지 않은 검찰의 행위에 대해 이미 광범위한 여론층이 잘못이라고 동조하고 있다.그런데 그것이 국민적 지지를 모으는 듯하다고 해서 국회를 거부하고 심지어 정권투쟁으로 나가겠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 (飛躍)이전에 정치에 대한 발상,정치의방법에 대한 생각이 잘못된 때문이 아닐 수 없다.
야당은 이번 54조원 규모의 예산안을 처리하는데 있어 아무런삭감 목표도 세우지 못했다.장외투쟁 때문에 할 새가 없었다는 것이다.기습처리 직전 야당이 내놓은 마지막 절충방안이라는 것도추곡값을 5% 올려 1천1백만섬 수매하고 일부 예산을 증액하라는 지역구性 사업이라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다.그러니『야당의원들이 복도에 와서 자기 구역사업의 처리를 부탁하더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는가 말이다.복도에서 예산을 심의할 만큼 다급한 사항들이 많다면 왜 당당하게 들어가 심의하지 않는가 말이다.예산안에 대한 삭감 목표나 관련 세법안(稅法案)하나없이「무조건 통과반대」를 외치는 것은 정당한 투쟁이 아니다.법정기일을 넘기는 줄 번연히 알면서 등원일자를 정하거나 예산재심의를 요구하는 것은 변칙을 유도하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의 정치는 보여주는 정치에 치중했다.멱살을 잡고 잡히는 모습,국회의장(또는 부의장)이 의사봉 아닌 손바닥으로 두드리는 모습,몸싸움….이것이 거의 유일한 국회 투쟁의 방법으로 생각되어 왔다는 말이다.그래서 야당은 조(組)를 짜 문간을 지키고,여당은 이를 피하는 기발한 방안을 짜내고,그러면 언론은 으레「날치기」「변칙」운운하며 보도하고….이것이 우리 정치의 끝없는 악순환이었다.왜 우리국회엔 멋있는 논쟁은 한번도 없고 몸싸움과 변칙 밖에 없는가.
우리는 이번 예산안이 겨우 3,4일 졸속심의된 점에 대해 여당의 책임을 물어왔다.12.12 군사반란 주모자들을 기소하지 않은 정치적 처리에 대해 분명하게 그 잘못을 지적해왔다.그러나오늘의 이 정치 파괴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는 분명하다.그리고 야당이 다시 장외로 달려가 이를 빙자해 정권퇴진 운운한다면 우리는 정치의 절차를 파괴한 책임이 어디 있는지를 분명히 따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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