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학부모·교사·교수 긴급 좌담

수능 ‘평준화 등급제’ 무엇이 문제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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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수험생 학부모, 고교 진학지도 교사, 대학 입학처장. ‘평준화 등급제 수능’을 바라보는 세 명의 당사자가 11일 중앙일보 편집국에 모여 수능의 문제점과 보완책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왼쪽부터 신동원 휘문고 교사, 김영수 서강대 입학처장, 고3 학부모인 서은주(45)씨. [사진=김성룡 기자]

처음 치러진 평준화 등급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성적표가 통지된 지 한 주가 지났지만 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1점 차이로 등급이 떨어진 수험생들이 힘들어 하는 것은 물론이고 진학지도 교사들도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수많은 동점자(같은 등급) 중 학생을 선발해야 하는 대학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중앙일보는 수험생 학부모, 고교 진학지도 교사, 대학 입학처장과 함께 등급제 수능의 문제점과 보완책을 모색하는 좌담회를 했다. 좌담회는 11일 중앙일보 편집국에서 열렸다.

▶사회=평준화 등급제 수능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현장에서 느끼는 혼란은 어느 정도 인가.

▶서은주=이번에 수능을 치른 고3 여학생의 어머니다. 아이가 한 문제 차이로 외국어 영역에서 2등급이 나왔다. 93점을 받았다는 수리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2등급이 나왔다. 모의고사에선 전 과목 1등급을 받았던 아이다. 성적표를 받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울먹였다. 어른들의 잘못 때문에 아이가 우는데, 부모로서 위로해 줄 말이 없었다. 발을 헛디뎠을 뿐인데 아예 등급제의 벼랑 끝으로 떨어져 버린 느낌이다.

▶신동원=원점수 1~2점이 부족해 2등급으로 밀리면 대학별 환산총점에선 4~10점까지 손해 볼 수 있다. 등급 컷에서 미끄러진 학생들의 불만이 크다. 만점으로 1등급을 받은 학생도 불만이 크다. 대입에서 자기보다 원점수가 한참 낮은 수험생과 같은 점수를 받는다는데 억울하지 않겠나. 수 십 년 간 대학 입시를 지도해왔지만 올해처럼 제자들 보기가 안타까운 적은 없었다.

▶김영수=답답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2등급이 7%인데 이를 모두 동점처리를 해야 한다. 원점수가 큰 차이가 나지만 2등급 학생은 모두 같은 점수를 줘야 한다. 이런 제도가 어디있나. 대학 입장에서는 논술·구술면접에서 실력을 구별할 수 밖에 없다. 입학 후도 걱정이다. 서강대는 3년 전부터 이공계 신입생은 우·열반을 만들어 고교 수준의 수학과 물리·화학을 다시 가르친다. 등급제 수능으로 입학하는 학생의 수준차가 더 많이 날 수도 있다. 우열반을 3단계로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회=노무현 정부는 수능 등급제를 도입하면서 사교육비를 줄여 공교육을 정상화하고 대학 서열화를 없애겠다고 했다.

▶김영수=정반대다. 서열화가 더 심화될 것이다. ‘1등급 대학’ ‘2등급 대학’ 하는 식으로 서열화가 더 노골화되고 있다. A대학엔 수능 언어·수리·외국어 영역 중 2등급이 2개면 지원 못한다는 식이 돼 버린다. 대학 내의 과별, 모집단위별 서열화는 줄어들고 대학이 통째로 등급화하는 것이다.

▶신동원=지금까지 공교육 정상화라는 명분을 갖고 대입 제도에 손 댄 일이 얼마나 많았나. 하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정책이 없었다. 대입 제도를 바꿔 공교육을 정상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입시 제도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실패한 것이다. 공교육 정상화 방안은 학교 내부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예컨대 진급이 안 된다든지, 출석이 안 되면 시험 점수를 안 주든가 극단적으로는 수능 응시에 제한을 가하는 방법도 있겠다.

▶서은주=효과가 전혀 없었다. 내신 비중이 커야 하는데 상위권 대학마다 수능 비중을 키웠다. 학생·학부모 입장에선 사교육 시장으로 가게 된다. 부모들은 이런 복잡한 입시 제도를 따라 잡기 힘들다. 실제로 몇 점을 받았는지도 모르는데 등급이라고 턱 내놓으니 믿기지도 않는데 대학마다 영역 별로 가중치를 두고 환산점수가 다르다니 혼란스럽다. 자녀가 인생에서 처음 겪는 가장 중요한 선택인 대학 입시에서 부모가 소외되는 것이다. 미안하니까 학원에 보낸다. 돈을 들여 진학 상담을 받게 된다. 결국 논술이 중요하다니 하루 10만원짜리 과외를 보낼까 말까 고민한다.

▶사회=등급제 수능은 도입 당시부터 반대가 심했다고 기억한다. 애초에 실패할 수 밖에 없던 제도 아닌가.

▶김영수=대학들은 등급제 수능으로는 공교육 정상화도 안되고 사교육도 줄지 않는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정부는 그런 얘기를 무시한채 끝내 등급제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이제 와선 혼란이 생긴 것은 내신 반영 비율을 안 높인 대학 탓이라고 공격한다. 지금 있는 교육부 관리들은 사실 등급제 도입과는 상관도 없다. 정권 초기에 대통령 자문 교육혁신위(당시 위원장 전성은)가 강행한 일이다. 당시 혁신위에 몸담았던 인사들은 왜 지금 한마디도 안하는지 모르겠다. 등급제 수능이 야기한 엄청난 혼란의 책임을 분명히 물어야 한다.

▶신동원=대학입학을 게임으로 만들어 버렸다. 9월 평가원 모의고사 땐 수리 가 1등급이 6%를 넘었다. 당시 1등급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번 수능에선 수리 가가 다소 어렵게 나올 것으로 예측했다. 상위권 학생들은 애써 난이도 높은 문제를 풀며 수학에 대비했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9월보다 더 쉬웠다. 수학 공부에 매달렸던 상위권 학생 입장에선 실력이 아니라 실수가 등급을 갈라 버렸다. 그 실수로 의대 등 자연계 최상위권 대학을 바라보던 아이들의 꿈이 깨져 버렸다. 반면 이번 수능에 언어 영역은 어렵게 나와 1등급 컷이 90점으로 추정된다. 10점이라는 변별력의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수험생의 원성이 크지 않다. 대학이 등급 격차를 더 확대한 것에 대해선 교사·학부모 모두 불만이다.

▶서은주=내신 반영 비율이 정말 컸더라도 반발이 있었을 것 같다. 내신 비율 높인다고 했었을 당시에도 학교별, 지역별로 반발이 있지 않았나. 학교 서열화를 조장하는 것도 문제지만 명백히 존재하는 학교 간 실력차를 없다고 우기는 것도 말이 안된다. 학생·학부모도 상식이 있다. 똑같은 실력의 아이가 이 학교에선 3등급이고 저 학교에선 1등급이라면 그 제도를 누가 믿겠나.

▶사회=많은 문제점이 드러난 등급제 수능을 계속 유지해야 하나. 보완책이 있을 것 같은데.

▶김영수=크게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지난해처럼 표준점수제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게 가장 사회적 혼란이 적은 방법이다. 일부에서 대입 제도 변경 하려면 3년 전에 예고 해야 한다는데 그렇지 않다. 고등교육법에 따르면 시행 6개월 전에 공지하면 된다. 이렇게 혼란스런 등급제 수능을 왜 계속 끌고 가야 하느냐. 교육적 목적보다는 정치적·이념적 명분싸움이 돼 버렸다.

굳이 등급제를 고집하려면 등급을 더 세분화하면 혼란을 다소 줄일 수 있다. 15등급제로 가는 것이다. 1, 2점 차로 등급이 갈리는 경우는 있겠지만 지금처럼 (원점수가) 10여점 차이가 나는 수험생이 한 등급으로 평가되지는 않을 것이다. 수능 1점 차로 대입에서 15~20점차이가 나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서은주=적어도 두 번은 수능을 치르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성적 올리는 것만이 교육이 아니다.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아이들이 3년, 12년을 공부했던 실력을 판정 내리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그것도 등급제처럼 납득하기 힘든 제도로 낙인을 찍는 것은 교육적 처사가 아닌 것 같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실력을 납득해야 제도가 정착되지 않겠나.

▶신동원=내신도 9등급제이지만 원점수와 표준점수 등을 병기한다. 수능도 어느 정도는 보완적인 데이터를 제공해야 하지 않겠나. 내신은 중간고사를 망쳤으면 기말고사에서 만회하는 등 ‘패자 부활’의 기회가 여러 차례 있다. 수능은 한 번의 실수도 용서하지 않는 냉혹한 제도다. 6월, 9월의 평가원 모의고사를 수능처럼 공식화해서 응시 기회를 세 차례로 늘리든가 하는 개선책을 고려할 수 있겠다.

▶사회=다음 주면 새로운 대통령이 결정된다. 차기 대통령이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이 있다면.

▶신동원=공교육에 대해 부정적 뉘앙스를 담고 있는 ‘정상화’의 취지가 아니라 ‘내실화’의 방향으로 고교 교육을 개선해야 한다. 3불 정책의 한축인 ‘고교 등급제’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졸업한 선배의 성적으로 그 학교 재학생의 실력을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고교 과정에 전문교과도 있고 심화교과도 있다. 그런 교육과정을 얼마나 이수했고 어떤 성취를 거뒀는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고교 자체를 등급으로 나누는 것은 문제지만 해당 학생이 고교에서 어떤 과정을 이수했는지를 따져 평가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서은주=사교육비 경감이 최우선이다. 대학이나 고교의 서열화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이는 인정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아이들도 등급제 수능에 분노한다. 변별력도 없고, 공부 부담이 줄지도 않는다. 모의고사에 응시 제한을 두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시험은 재학생 따로, 재수생 따로 보게 하고 등급은 다 합쳐서 상대평가로 내는 방식으로는 수험생만 고달플 뿐이다. 자기 실력, 수준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못하게 학생들 눈을 가려 놓고 막판에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 드니 학생들이 납득하겠나.

▶김영수=4년제 대학 총장들의 모임인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조만간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당장 내년 입시부터 등급제 수능을 바꿔야 한다. 많은 대선후보들도 어쨌든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어 개선될 것으로 믿는다.

정리=배노필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수능 등급제=올해 수능부터 도입됐다. 수험생에게 영역·과목별 원점수와 표준점수·백분위를 알려주지 않고 등급(1~9등급)만 제공한다. 1등급은 상위 4%까지, 2등급은 그 다음 7%까지, 3등급은 그 다음 12%까지 나눠 구분한다. 등급 구분 점수에 동점자가 몰리면 상위 등급을 부여하고 다음 등급 해당자는 그 비율만큼 줄인다. 수능 등급제는 2003년 7월 출범한 교육혁신위원회(당시 위원장 전성은)의 작품이다. 2004년 8월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정회의에서 수능 9등급제 도입이 확정됐다. 당시 혁신위는 5등급제를 주장했으나 반대에 부닥쳤다. 1등급의 범위에 대한 갈등도 컸다. 청와대와 여당 일부 의원은 ‘1등급 7%’를 주장해 논란이 일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4년 10월 28일 ‘수능 9등급제, 1등급 비율 4%’로 2008 대입제도 개선안을 공식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