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36. ‘억지 봉잡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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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필자가 1960년 명동 국립극장에서 연주하는 모습.

‘제3의 사나이’라는 영화가 있다. 1949년 영국에서 만든 것인데, 음악하는 사람들도 눈여겨 봐야할 작품이다. 독일·오스트리아에서 널리 쓰는 현악기 치터(Zither) 하나만을 연주해 배경 음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야금과 마찬가지로 현을 뜯어서 내는 악기 하나만으로 연주한 이 영화음악은 큰 인기를 끌었고, 악기의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도 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같은 시도가 있었다. 50년대 말, 미 공보원(USIS) 원장이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제3의 사나이’와 같은 영화음악를 한국에서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치터 대신 가야금을 사용해서 모든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단순한 하나의 악기를 가지고 만드는 음악이야말로 큰 인기를 끌 것”이라고도 했다. 처음에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가야금 연주자일 뿐 당시까지만 해도 음악을 직접 만들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희극배우 김희갑이 나오는 영화라고 해서 나도 곧 구미가 당겼다. 김희갑은 당시에 얼굴만 봐도 사람들이 웃는 배우였다. 노래도 잘 하고 음반까지 냈던 그가 나오는 이 영화의 제목은 ‘억지 봉잡이’였다.

나는 가야금 하나를 들고 마산으로 내려갔다. 당시 영화 음악을 녹음하는 시설을 갖춘 곳은 마산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연주는 철저히 즉흥적으로 진행됐다. 영화를 끝까지 여러 번 본 후에 부분마다 다시 보면서 그때그때 음악을 만들어 넣는 것이었다. 잘 해내야겠다는 의욕이 솟아났다. 화면 앞에 앉아있으면 눈앞에 ‘1·2·3’ 모양의 빨간 불빛이 깜박였다. ‘3’ 모양의 불이 켜지면 딱 맞춰서 연주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산조나 정악을 바탕으로 장면마다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어 넣었다. 자세한 영화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화면 자체가 우스운 장면이 많고 스토리도 만만치 않게 웃긴 코미디였던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영화 ‘억지 봉잡이’가 탄생했다.

미 공보원 원장은 우스운 영화 장면과 가야금의 해학이 담긴 소리가 썩 잘 어울린다고 칭찬했다. 본격적으로 작곡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작곡 연습을 한 셈이 됐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악상에 따라 자유롭게 연주하는 느낌이 아주 좋다는 것도 알게 됐다. 영화의 내용을 거의 잊었기 때문에 요즘에도 가끔 이 영화가 아직도 남아있는지 궁금해진다. 아직도 미 공보원에 영화 필름이 보관돼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 자료를 찾지는 못했다. 당시 미 공보원은 주로 기록영화와 문화영화를 만들었는데, 무슨 생각으로 이런 극영화를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참 새로운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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