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이제는변해야한다>1.국회 달라져야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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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정기국회는「부실(不實)정치」의 표본이다.하루 놀고 하루 쉬는공전(空轉)과 단독국회라는 파행으로 얼룩져왔다.
날치기와 몸싸움의 저질 정치코미디가 연출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사정은 임시국회도 비슷하다.그렇지만 예산을 다루는 정기국회가 훨씬 심하다.
정기국회는「벼랑끝 정치」의 현장이다.1년중 9월부터 1백일간몰아 여는 정기국회 처음에 여야는 충실한 예산심의와 민생정치를약속한다.
그러나 이런 다짐은 여야공방으로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벼랑끝에서야 타협에 나서는 정치권의 체질로 상처투성이가 되기 일쑤다. 여야의 대치상황은 심할때「마주 달리는 두개의 열차」로 표현됐다.5共 후반기 12대시절 정기국회가 그랬다.문민정부의 국회에서도 그런 극단적 단어가 등장했다.국회의 질적 변신은 쉽지않은 것이다.
정기국회의 약사(略史)는 파행의 정도를 실감시켜준다.85년 2.12총선으로 야당(신민당)이 제 모습을 갖춘뒤 첫 정기국회는 고대앞사건(朴燦鍾의원등 기소조치)처리에 대한 야당의 반발로20일 늦게 문을 열었다.
곧이어 김녹영(金祿永)국회부의장 선출파동으로 다시 9일,민정당의 예산안 날치기파동으로 14일간 국회를 문닫았다.85년은 절반 가까운 43일(당시 회기 90일)을 논 셈이었다.
그 시절 야당은 민주화를 위한 확실한 투쟁수단으로 국회를 볼모로 활용했다.민주화쟁취 우위시대에「필요 악(惡)」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86년 정기국회는 국시(國是)발언을 한 신민당 유성환(兪成煥)의원을 구속하는 바람에 공전됐다.『오동잎 떨어지면 가을을 감지한다』는 얘기가 유행했듯 정부의 강경대응으로 국회는 파국의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리고 여야의 몸싸움이라는 볼썽 사나운 장면으로 예산안이 처리됐다.
대통령선거로 인해 87년에는 회기가 줄어 12대 3년간(임기1년 단축)은 국회가 마음잡고 예산이나 정책을 심의한 적이 드물었다. 88,89년의 여소야대(與小野大)시절 정기국회는 그런대로 굴러갔다.그러나 5공청산에 관심이 쏠려 정책쪽은 뒷전으로밀렸다. 90년 3당합당으로 국회는 다시「공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거여소야(巨與小野)」로 전락한 김대중(金大中)총재의야당은 국회를 소수의 활로를 찾는 최후의 방편으로 활용했다.
그해 7월 임시국회에서 민자당이 국군조직법등을 무더기 변칙처리한 것에 항의해 야당은 의원직 사직서를 냈다.그때의 70일간국회 공전은 아직 최장기 기록으로 남아있다.그 이전에 3선개헌파동(69년)때도 67일로 긴 국회공전이 있었다 .뒤늦게 국회문을 열었지만 정책안건은 벼락공부하듯 막판의 졸속과 날림이 될수밖에 없었다.
올 정기국회는 초반 밀도있는 국정감사로 잘 나가다가 성수대교붕괴 참사로 한차례 쉬었다.12.12기소유예조치에 대한 민주당의 항의로 11월5일부터 문을 닫았다.
민자당은 28일부터 본격적인 단독국회로 들어갔다.그동안 예산등 2백9건의 민생안건이 20일간 낮잠을 잤다.
정기국회 공전은 습관성이 됐다는 느낌마저 든다.
문민정부 시절에도 독재시대와 똑같은 행태를 벌이고 있다.
공전의 원인이 습관성이든,정치권의 구조적인 문제 탓이든,명분때문이든,올해의 정기국회도「정치 부실」의 심각성을 반영하고 있다. 〈朴普均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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