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경제] 노키아의 기습

중앙일보

입력

중앙SUNDAY

‘적 진영에 불이 났을 때 겁주며 공격하라!’

손자병법에 나오는 36계 가운데 다섯 번째 책략이다. 적이 약점을 보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들어가 승리하는 계책이다.

세계 선두 휴대전화 생산업체인 노키아가 아직 석권하지 못한 미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바로 이 전술을 쓰고 있다. 현재 미 시장 1위인 모토로라가 ‘내부 수리’로 여념이 없는 틈을 노린다는 것이다.

모토로라는 레이저폰 이후 히트 제품을 내놓지 못해 세계 시장점유율이 삼성에 뒤져 3위로 밀려났다. 에드워드 잰더를 내치고 그레그 브라운을 새 최고경영자(CEO)로 선임했지만 조직 추스르기에 바쁘다.

이런 틈을 놓치지 않고 노키아의 CEO인 올리-페카 칼라스부오가 지난주 “우리는 미국 시장에서 1등이 되는 야망을 품고 있다”며 “어떤 비용을 치르고서라도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약점을 보인 적을 앞에 둔 공격자 특유의 자신감이 엿보인다.

먼저 노키아는 부호분할다중접속(CDMA)방식 단말기를 다시 생산하기로 했다. 이 회사는 2003년 유럽시장에 집중하기 위해 CDMA방식 단말기 생산을 중단하고 유럽식이동통신방식인 GSM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후 미국 시장 선두 자리를 모토로라에 빼앗겼다. 현재는 4위에 뒤처져 있다.

노키아가 CDMA방식 단말기를 생산하면 미 이동통신회사인 AT&T와 버라이존, 스프린트 넥스텔, T-모바일의 가입자에게 모두 휴대전화를 팔 수 있게 된다. 마케팅 저변이 양적으로 크게 늘어나는 셈이다.

이와 함께 이 회사는 무선전화와 인터넷 시대 융합이라는 대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략도 공세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 지도제작 업체인 미국 내브텍을 81억 달러를 들여 인수했다.

미국 단말기 시장의 판도도 급변할 전망이다. 현재 미 시장 판도는 1위인 모토로라(시장점유율 31%)에 이어 2위 삼성(20%), 3위 LG(16%), 4위 노키아(12%) 순으로 형성돼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노키아가 내부수리 중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미국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기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내다보고 있다. 경쟁 기업의 약점을 파고드는 노키아를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CEO 칼라스부오의 승부감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춘추전국 시대를 방불케 하는 글로벌 시장에서 약점을 노출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기기 위한 필수조건인 셈이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