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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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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1980년 미국 대선에서 영화배우 출신의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는 현직 대통령의 프리미엄을 가진 지미 카터 민주당 후보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도덕 정치’를 주창했던 카터는 득표율 41%(레이건 50.8%), 선거인단 수 49명(레이건 489명)을 얻는 데 그쳤다. 레이건 진영은 선거 캠페인에서 카터가 4년 전 내놓은 실업률·감세·균형예산 관련 공약을 겨냥했다. 압권은 실업률 3% 공약(空約)이었다. 레이건 측은 TV 광고에서 “카터의 임기 중 100만 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고 실업률은 8%에 이르렀다”고 공격했다. 그러면서 “당신은 4년 전보다 살기가 나아졌느냐”는 질문으로 유권자의 표심을 흔들었다.

92년 재선을 노리던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을 침몰시킨 것도 경제 문제였다. 아칸소 주지사 출신의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라는 한 방으로 부시를 KO시켰다. 걸프전 승리라는 외치의 성과는 부시를 지켜 주는 버팀목이 되지 못했다. 제3 후보였던 로스 페로는 ‘일자리, 부채, 워싱턴의 혼란’이라는 구호로 부시를 몰아붙였다.

동양에선 예부터 이식위천(以食爲天·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사상이 제왕학의 금과옥조처럼 통용돼 왔다. 민생 도탄과 부패는 절대 왕조의 붕괴를 예고하는 적색 경보였다. 일본 자민당의 40년 독주 체제가 94년 무너진 것은 장기 불황과 잇따른 권력형 비리 때문이었다. 이후 일본 정계에선 ‘단명 총리’가 양산됐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은 2001년 베이징에 간 김중권 전 민주당 대표를 만나 “내가 주석이 돼 만난 일본 총리가 10명은 넘을 것”이라고 비꼰 적이 있다. 그 말에는 연 10% 안팎의 고도 성장을 바탕으로 자신은 태평성대를 이뤘다는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17대 대선에 나선 대선 후보들은 성공·신뢰·행복·변화의 슬로건을 외치고 있다. 너도나도 ‘경제 대통령’을 다짐한다. 그중에는 수백만 개의 일자리 창출 공약도 있다. 그러나 세계화와 양극화의 격랑 속에서 장밋빛 공약들이 얼마나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한국은 환율 하락 덕에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앞두고 있지만 국민행복지수는 전 세계 178개국 중 108위에 불과하다. 그레그 이스터브룩은 『진보의 역설』에서 “현대인에게 성공과 행복은 산 너머 걸린 무지개와 같다”고 주장했다. 대선 후보들의 화려한 슬로건을 보면서 ‘한 번의 약속은 천금과 같다(一諾千金)’는 증자의 말을 떠올린다.

이양수 정치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