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피치] 코치 마음을 움직인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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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기아 타이거스 장채근(40)배터리코치는 프로입단 13년차 이재주(31)가 '불쑥' 내민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하와이에서 전지훈련 중인 장코치와의 전화통화에 따르면 편지는 "저는 2002년 시즌 개막을 하루 앞둔 4월 4일 현대에서 기아로 트레이드됐습니다"로 시작했다고 한다.

이재주는 "개막 직전에 팀을 옮기다 보니 꼭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고, 그래서 오버 액션을 하기도 했습니다. 포수로 경기에 나가 게임을 망친 적도 있습니다. 어느덧 기아에서 두번째 시즌을 마쳤고, 그동안의 실수가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라며 자신의 담담한 심경을 적어내려갔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이제 포수가 어떤 자리인지 알 것 같습니다. 다시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꼭 다시 도전해보고 싶습니다"라며 지명타자에서 포수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한다.

이재주는 강릉고 시절 포수였고, 프로 경력 12년 동안 포수 마스크를 가지고 다녔지만 한번도 주전으로 뛴 적이 없다. 그저 장거리포 한방이 있는 대타요원이었고, 경기 후반 마땅히 마스크를 쓸 선수가 없을 때 그 자리를 메우는 정도였다. 2년 전 현대에서 기아로 트레이드 된 뒤에는 타격에만 전념했다. 그 결과 지난해 데뷔 이후 가장 많은 1백3경기에 지명타자 또는 대타로 출전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대형타자 마해영(34)과 심재학(32)이 지난 겨울 팀에 합류하면서 이재주의 지명타자 자리가 위태로워졌다. 또다시 대타 겸 백업포수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그는 장코치에게 진심을 담은 편지를 썼다.

장코치는 그 편지를 받은 뒤 한참을 고민했다고 한다. 주전포수 김상훈(27)을 필두로 김지훈(31).김성호(23) 등 이재주보다 포수로서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 그러나 장코치는 고민 끝에 캠프 기간 이재주에게 포수훈련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편지가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지난해 돌풍의 주역 SK는 시즌 도중 외국인선수 디아즈가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 한 통에 팀워크를 다잡고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디아즈는 발목 부상으로 잠시 팀을 떠나면서 자신의 공백을 우려하는 동료들에게 "다른 팀이 가장 무서워하는 팀이 우리라는 것을 잊지 말자. 힘을 내라"며 오히려 격려를 보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인사이드 피치'도 선수들에게 기억에 남는 편지를 몇 통 받았다. 덩치와는 전혀 다르게 깨알 같은 글씨로 종이를 꽉 채웠던 양준혁(삼성), 데뷔 첫해 14승을 올리고도 이제 겨우 시작이라며 당돌한 포부를 밝혔던 정민철(한화), 야구인생의 황혼기에서 반드시 재기하겠다며 이를 악문 각오를 보여준 김동수(현대) 등의 편지가 떠오른다.

진심을 담은 글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인다. 어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전해준 특별한 편지라면, 읽는 사람의 가슴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좀 더 순수해지고, 좀 더 진지해지기 위해, 야구계에 더 많은 '이재주의 편지'가 오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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