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비서실>201.전두환씨 압박 마지막 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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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6共 청와대는 5共 청산의 마지막 카드로 검찰이라는 칼을 뽑았다. 정호용(鄭鎬溶)의원이 연희동을 찾았다가 오히려 전두환(全斗煥)前대통령을 자극하는 역효과만 내고 돌아온 이틀뒤인 88년11월7일 全전대통령의 사촌동생 순환(淳煥)씨가 구속됐다.같은날 하나뿐인 처남 이창석(李昌錫.이순자여사의 남동생) 씨가 운영하던 회사에 대한 세무사찰이 시작됐다.그로부터 나흘뒤인 11일 합천의 全전대통령 생가가 학생들의 화염병시위로 불탔으며,바로 다음날인 12일 全전대통령이 가장「죄송스럽다」고 생각하는친형 기환(基煥)씨와 사촌동생 우환(禹煥) 씨,동서 홍순두(洪淳斗)씨가 한꺼번에 구속됐다.마침내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이 동남아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던 14일에는 全전대통령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처남 李씨마저 검찰에 소환됐다.
全전대통령이 특별히 가슴 아파했던 친형과 처남.이 두사람의 구속은 5,6共 관계악화의 촉매로 작용했다.이를 쉽게 이해하기위해서는 친가.처가에 대한 全전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의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친형 기환씨 사건은 全전대통령 집안의 가풍과 5共 친인척 비리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대표적 사례.기환씨는 원래 10남매중 여섯번째요,아들로는 세번째였다.그러나 아들 둘(첫째와 둘째),딸 하나를 일찍 잃는 바람에 3남4녀가 되면서 기환씨는 맏형이 되었다.全씨 가족은 고향 합천에서 만주로 갔다가 다시 대구로 돌아와 움막을 짓고 가난하게 살기까지의 과정에서 생사의 고비를 몇차례 넘기기도 했다.고단한 삶에다 전통 유교집안 교육을 받았기에 형제간의 우애는 남달리 돈독했다고 한다.그래서 全전대통령은 고급장교시절 일선 교통경찰이던 형의 친구들에게 무릎을 꿇고 술잔을 기울여 친구들이 황송해하기도 했으며,형은 동생이 별을 달자 동생 체면을 생각해 경찰직을 그만두고 과천에서 농사를 짓기도 했 다.
문제는 얼마든지 미담(美談)일수 있는 이런 가난속의 남다른 형제애가 권력과 결부되면서 부정부패와 결부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6共 청와대 관계자였던 W씨는『기환씨가 관련된 문제였던 노량진수산시장 강제인수건은 사실 5共 청와대가 친인척관리의 효율화를 위해 만들어낸 아이디어였습니다.그렇지 않아도 어렵게 살고 있는 친인척인데다 워낙 친인척 주변에 파리떼들이 많이 모여들어 온갖 협잡을 부려대니 당시 친인척 담당이던 민정비서실이 고민이 많았죠.그래서「친인척들이 충분히 먹고 살수 있는 이권을하나 만들어 다른 일들에는 친인척이 개입하지 못하게 하자」는 생각을 했죠.그때 서울시쪽에서 노량진수 산시장이 무난한 이권이라는 아이디어를 냈고 민정비서실과 서울시가 압력을 가해 시장운영권을 빼앗아 기환씨에게 넘기고,기환씨는 全전대통령 친인척의 대표로 이를 맡은 것이죠』라고 설명했다.
5共 나름대로 친인척비리를 최소한으로 막고 효율적으로 관리하자는 차원에서 마련한 아이디어였으나 그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탈법이요,권력남용이었다.남달리 형님을 받드는 全전대통령의 형제애에 이같은 저간의 사정이 있었기에 기환씨의 구속이 全전대통령의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음은 충분히 짐작가능하다.
그러면 처남에 대한 애틋한 정은 또 어떠했는가.대개 당시의 군인들은 고급장교가 되면서 서울에 집을 마련하고 혼자 임지를 옮겨다니기에 가정을 돌볼 시간이 없기가 일쑤였다.혼자 가정을 꾸려가야 하는데다 간혹 남편의 진급을 위해 상급자 부인을 찾아다니기까지 했기 때문에 아내의 발언권이 강한게 일반적 경향이었다.全전대통령의 경우는 금실이 좋은데다 일찍이 처가살이를 10년이나 했던지라 처가사랑이 남달랐다고 한다.처남이 검찰조사를 받던 무렵 全전대통령은 연희동을 찾아 온 지인들에게『처가살이 10년을 하는데 변소를 겸한 목욕탕이 하나밖에 없어 곤욕을 치렀어요.장인은 일찍 출근하는 저를 생각해 오전5시에 일어나 세수를 끝냈습니다.그런 분을 고생시켜 무척 죄송스럽습니다.하나밖에 없는 처남에게도 매형으 로 볼 낯이 없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처남은 처가에서 딸 셋만 있다가 늦게 낳은 외아들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큰누나인 이순자여사 못지않게 맏사위 全전대통령도 그를 귀여워해 20세 아래인 어린 처남을 마치 아들인양 부부가 같이 안고 자기도 했을 정도라고 한다.그 역시 全전대통령의 후광으로 특혜성 사업을 벌여오다가 자형의 정치적 운명과 함께 영어의 몸이 되고만 것이니 全전대통령으로서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이같은 全전대통령의 가족사적 배경과 이에 따른 애틋한 심경을그만큼 잘 아는 사람은 아마도 盧대통령이었을 것이다.이들과 육사 동기인 Q씨의 표현처럼『두 집안은 부엌의 젓가락,숫가락 숫자까지 서로 알고 지낼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으 니까.
그래서 盧대통령은 동남아로 출국하기 전날밤인 11월2일 이순자여사가 김옥숙여사와의 내실통화에서 친인척수사에 항의하자 곧바로 全전대통령에게 전화해 위로하기도 했다.盧대통령은『너무 걱정마십시오』라고 위로하면서 특별히『기환이 형님은 걱 정안해도 된다』고까지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때문인지 당시 全전대통령은 전화를 끊은뒤『더이상 누가 구속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주위를 안심시키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같은 위로가 5共 청산 비밀보고서의 구상과 맞지 않을뿐 아니라 盧대통령이 고위당정회의에서 일갈한 내용과도 다르다는 점이다.
비밀보고서는 그 마지막 항목인「법적 처리문제」에서「全전대통령부부에 대하여는 자진해명등의 조치가 있을 경우… 사법적 처리를면제함이 온당하나,기타 친인척 비리및 이에 관련된 공무원에 대하여는 증거가 있으면 사법적 심판을 받도록 하 여 제6공화국의단호한 비리척결의지를 보이는 것이 금후의 정치발전과 공직기강쇄신에 귀감이 되리라 보임」이라고 건의했었다.그리고 盧대통령은 10월27일 고위당정회의에서 정부관계자들에게 「불법은 수사해 척결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물론 실제 진행상황은 비밀보고서의 구상을 벗어나지 않았다.결과적으로 盧대통령은 거짓말을 한 셈이 됐고,全전대통령이 결정적으로 격분한 것도 「나를 속였다」는 배신감이었다.全전대통령은 盧대통령의 위약을 「의도적인 속임수」로 받아들였다 .
이에 대해 6共 관계자들은 「검찰의 불독과 같은 속성」으로 의도했던 이상의 사법처리 결과가 나와 연희동을 자극했다고 말한다.청와대 관계자 X씨는『검찰만큼 권력변화에 민감한 곳도 드물겁니다.권력전환기가 되면 칼날같은 제 위상을 찾고 자하는 경향이 있어요.쉽게 말해 평소보다 더 시퍼렇게 칼날을 세우는 겁니다.그럴때 부정비리가 걸려들면 불독처럼 물고 놓지 않는 거예요.「적당히 처리하라」는 지시가 먹혀들지 않게 되죠.88년말 당시 분위기가 전형적으로 그랬습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검찰 관계자 Y씨는 검찰의 또다른 권력지향성으로설명을 달리했다.그는『검찰이 권력전환기에 위상을 찾으려는 경향도 있지만 검찰이란 행정부의 일부이기에 어디까지나 위쪽 분위기를 보고 움직인다는 것이 더 중요한 속성이죠』라 고 솔직히 토로했다.그는 이어『우리 검찰은 사실 당시 언론을 좇아가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全전대통령은 무슨 큰 일이 있으면 전화로 직접지시하는 일이 많았었죠.그러나 盧대통령은 아무 지시가 없었어요.어떻게 보면 「검찰이 알아서 마무 리지어달라」는 식이라고 생각됩니다.대신 언론에서 앞서 가더군요.검찰에서 보기에 정치권,보다 구체적으로 청와대쪽이 아니면 알기 힘든 내용들이 언론에 뻥뻥 터지는 거예요.나중에 확인해보면 사실이에요.당연히 언론에터지는 문제는 청와대의 뜻,즉「검찰이 나서서 처리해달라」는 간접 지시로 받아들였습니다』고 말했다.
***검찰의 과잉충성 그는 이러한 청와대의 움직임에 대해『盧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기보다 측근들이 알아서 처리하는 것으로 파악했으며,그러다보니 과잉충성도 일부 있었다고 봅니다』고 덧붙였다.즉 검찰은 명백한 대통령의 지시는 없었지만 적어도 청와대의 뜻을 헤아려 움직였으며,과잉충성은 검찰보다 청와대 측근들의몫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특히『全전대통령의 처남 이창석씨 회사에 대한 수사의 경우 검찰이 수사를 시작하려고보니 이미 국세청에서 조사를 끝내고서 자료를 넘겨주더군요.국세청에서 미리 조사를 끝냈다는 얘기는뭔가 위에서 지시가 있었다고 봐야죠』라며 청와대 주도 가능성을확신했다.
한편 당하는 全전대통령은 연희동에 앉아 줄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검찰의 소환장과 함께 구속예정을 통보받은 친인척들이 하나씩 찾아와 작별인사를 했지만 全전대통령은 할 말이 없었다.친인척들은 한결같이『나야 괜찮지만 각하가 위험하다』며 오히려 全전대통령을 걱정했다.그리고는『차라리 외유를 떠나시는게 낫겠다』고말하곤했다.
이무렵이 연희동의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였다.당시 연희동에 머물렀던 全전대통령의 사위 윤상현(尹相炫)씨가『개인적으로6共쪽에서 암살자를 보내올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말할정도였다.마침내 全전대통령도 반격에 나섰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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