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방 재수생의 대치동 일기 “논술에서 1점이라도 더 따려 상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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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르르릉.”

자명종을 보니 오전 7시를 가리키고 있다.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니 낡은 침대와 작은 책상 하나가 보인다. ‘아, 울산 집이 아니지.’ 정군은 고시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저기서 자명종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정모(18·재수생)군은 지난달 18일 밤에 울산에서 올라왔다. 다음날 족집게로 소문난 서울 대치동 C논술학원의 한 달 코스 ‘명문대반’ 논술특강에 등록했다. 이달 20일 시작되는 정시 모집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학원의 알선으로 서울 선릉역 인근의 H고시원에 들어왔다.

정군에겐 난생 처음 하는 고시원 생활이 낯설기만 하다. 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거나 굶는다. 기자가 찾은 지난달 29일에는 라면을 먹었다. 고시원에는 공용 컴퓨터 석 대가 있는데 한 번 쓰려면 줄을 서야 하기 때문에 인근 PC방으로 가곤 한다. 이 고시원에는 정군과 같은 ‘단기 논술 유학생’이 몰려 있다. 60명 중 40명이 영·호남에서 올라왔다. 일부는 현재 진행 중인 수시 2학기 전형에 맞춰 일주일~열흘 정도를 대치동 학원에서 보내기도 한다.

사흘 전에는 서울 대치동 Y논술학원에 다니려고 제주도에서 온 학생이 옆방에 들어왔다. 논술학원 밀집지역과 가까운 J고시원에는 방이 없어 대기자가 줄을 섰다고 한다. 이 고시원은 식사를 제공하며 한 달에 111만원을 받는다.

강의는 오전 8시30분에 시작해 오후 1시30분에 끝난다. 오후 2시가 돼야 학원 인근 분식집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밥을 먹고 나면 곧바로 고시원으로 온다. 그날 배운 것을 복습하고 글쓰기 연습을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고시원과 학원을 오가고 있다. 저녁 먹을 시간이 아까워 라면으로 때우거나 굶기도 한다. 밤 11시까지 공부하다 잠을 청한다. 6.6㎡(2평) 남짓한 고시원 방에 갇혀 있다 보면 우울증에 빠질 때도 있다.

정군이 사는 울산시 남구 옥동은 울산에서 ‘교육특구’로 뜨는 곳이다. 거기에도 논술학원이 더러 있다. 그런데도 상경한 이유는 논술시험에서 1점이라도 더 받기 위해서다. 정군은 “옥동의 논술학원 강사진의 수준이 서울에 비할 바가 못 된다”며 “저는 서울까지 올 생각이 없었는데 부모님께서 서울행을 권유하셨고 그 말씀을 따랐다”고 말한다.

“수능성적이 등급 간 경계선에 걸린 것 같아 불안합니다. 원하는 대학에 가려면 논술시험에서 만회해야 합니다. 등급제 수능 때문에 논술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서 지방 학생들이 서울로 올 수밖에 없어요.”

정군은 이달 말까지 학원을 다닐 생각이다. 한 달 학원비는 90만원, 고시원 숙박료는 40만원이 든다. 집에서 교통비·용돈으로 40만원을 받았다. 한 달 상경 기간 동안 170만원이 든다. 정군은 수시 2학기 전형에서 연세대 공대에 지원했다. 하지만 큰 기대는 안 한다. 하향지원 추세가 뚜렷하다는 얘기를 듣고 기대를 접었다. 정군은 12월에 논술학원 수업이 끝나면 울산에 내려갔다가 논술시험 직전에 올라올 예정이다.

이원진 기자 jealivr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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