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리 코끼리 사이에 끼인 한국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8호 26면

중앙포토

21세기 국제질서를 주도한 양대 강국은 미국과 중국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강국과 동시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한국은 두 강국 모두와 사이가 좋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지금까지 양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한국의 외교력은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그런 우호관계를 지속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키쇼르 마부바니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대 강국은 조만간 국제정치 무대에서 경쟁하며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사실 21세기가 막 시작할 무렵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이 심각해지려는 징조가 보였다. 그 갈등의 조짐이 9·11테러로 가라앉은 것은 국제정치 면에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신 불행은 이슬람 국가들로 향했다. 미국이 중국과의 갈등을 접어두고 9·11
테러의 배경으로 의심되는 이슬람 국가로 눈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갈등의 유예’란 소득을 얻은 셈이다. 양대 강국 간 갈등이 일단 유예됐다는 사실은 크게 보자면 이슬람 외 지역 모두에도 좋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세계사는 늘 최강대국(미국)과 최강대국으로 부상하는 대국(중국)의 관계에 의해 좌우돼 왔다. 양대 강국의 갈등이 증대될 때,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현대사를 통해 보자면 한국은 늘 미국과 가까웠다. 미국은 6·25전쟁 당시 한국을 구해주었다. 또 전후 재건 과정에서 한국이 ‘아시아의 호랑이’로 성공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도왔다. 미국은 한국을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함께 이룬 성공적인 국가 모델로 꼽는다. 한국의 엘리트층은 대부분 미국에서 교육받았다. 따라서 만일 미국과 중국 사이에 갈등이 심해질 경우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편에 서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역사적으로 보나, 정치 이데올로기적 성향으로 봐서도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지리적·문화적 변수도 중요하다. 지리적으로 한국은 중국의 이웃일 수밖에 없다. 이웃의 큰 나라를 불필요하게 자극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미국은 중국에 ‘민주주의를 배우라’고 가르치고 싶어 한다. 실제로 2006년 4월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미국과 중국 간의 관계가 성숙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서로 간의 이견을 굳이 감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후 주석과 함께 ‘중국 내 인권의 존중이나 자유의 중요성’에 대해 토론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의 경우 더 노골적이고 공격적이다. 그는 2006년 여름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중국은 국방비를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중국은 이미 여러 차례 “국방비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국방비는 세계 패권을 다툴 수 있는 강대국 사이에서 가장 민감한 이슈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이 갈등을 피해가며 조용히 성장하고자 하는 화평굴기 노선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미국의 이 같은 설교를 참아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 한국을 포함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비슷한 훈계를 참아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미국과 중국이 대립할 경우 한국은 문화적으로 내부 분열을 겪을 수 있다. 정치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한국은 서구 민주주의 클럽에 속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도 그 같은 한국의 국제정치적 위상을 말해준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적 배경은 서구 국가들과 다르다. 영국·호주·뉴질랜드·캐나다와 같은 앵글로색슨 계통 국가들은 미국과 문화적으로 하나이기에 연대감이 더 돈독하다. 중국에 대해 설교하는 데 동참하길 꺼리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은 문화적으로 동양권에 속한다. 체면이 중요한 문화다. 동양권 국가는 다른 나라에 설교하는 무례를 삼간다. 당연히 한국은 서구 국가들처럼 중국에 대해 민주주의를 설교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질적인 요소와 변수를 감안할 때 한국은 미국과 중국이 대립할 미래를 서둘러 대비해야 한다. 북한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한국의 전략적 최우선 순위는 늘 북한이었다. 북한의 침략을 우려했기에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관계 유지에 노력해 왔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최근 6자회담의 성공은 사실 중국의 외교적 역량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북한을 설득할 수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중국밖에 없다.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한반도의 통일보다 분단상태 유지를 바라는 강대국은 어느 나라일까. 이론적으로는 미국이나 중국이나 한국의 통일노력을 지지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 두 강대국이 통일을 지원할지는 의문이다. 미국이나 중국이나 한반도가 통일될 경우 일정 부분 외교적 지렛대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자신들의 손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한국의 지정학적 과제는 분명하다. 미·중 관계가 우호적인 동안 통일을 적극 추진할 것인가. 아니면 미·중 관계의 갈등이 올 때까지 그냥 있을 것인가. 갈등의 시대는 한반도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해답은 쉽지 않다.

강국 사이에 자리 잡은 나라의 처지를 비유한 스리랑카 속담이 있다. 코끼리가 싸울 때 잔디는 뭉개진다. 코끼리가 사랑을 나눌 때도 잔디는 망가진다. 코끼리 두 마리 사이에 있는 나라는 늘 지정학적으로 도전의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한국은 외교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보여왔다. 앞으로 미국과 중국 간의 관계가 보다 복잡해지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알력이 불거지게 될 것이다. 한국은 그 지정학적 숙명 때문에 더 뛰어난 외교능력을 보여야만 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