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교도 풍습 유행…"사랑은 못말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14일 오후(현지시간)카이로시 동부 외곽의 카르푸 대형할인매점.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이슬람권에선 낯선 붉은 색 하트꽃들이 맞는다.현관의 남는 가지마다 수십개의 하트 꽃이 피어있다. ‘하트 나무’ 옆 발렌타인 데이를 위한 특별 가판대.

무스타파 자키(51)의 19세에서 9세 사이 5남매가 선물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다. 붉은 봉지에 싸인 사탕.초콜릿. 아버지는 멀찍이 떨어져 담배연기만 날린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나."무스타파의 표정은 쓸쓸하다. 전기 전문가인 그는 "내가 꽤 개방된 편이라고 생각해도 애들 따라잡기엔 역부족"이라며 다시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무스타파는 사실 충격에 빠져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3년 근무를 마치고 13일 밤 가족 품에 돌아온 그는 다음날 애들 손을 잡고 문을 나선 뒤 기겁을 했다. 꽃을 사겠다는 아이들을 데리고 무심히 나온 그는 "여기가 이슬람 세계인지 유럽인지"를 연발했다.

허름했던 꽃가게들은 대형 붉은색 하트 등으로 요란하게 장식됐고 붉은 포장이 된 인형.초콜릿은 불티나게 팔렸다. 이른 아침인데도 그랬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스무송이 장미꽃 한다발에 1백여파운드(약 2만원). 이집트 초임 공무원 월급의 절반꼴이다. 3년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풍경에 무스타파는 넋을 잃었다.

붉게 포장된 꽃과 초콜릿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들, 점심 때 들른 이집트 전통식당에서 밸런타인 데이 특별메뉴를 사달라고 조르는 애들을 보며 무스타파는 종일 심란했다.

애들이 아빠를 돈 내는 사람으로만 보는 것 같기도 해 서운한 마음이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무스타파가 '혼란'에 빠진 이유는 이슬람 세계의 변화 때문이다. 이슬람 원조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만 해도 아직은 엄하다. 종교경찰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밸런타인 데이 흉내를 냈다간 경을 친다.

귀국 비행기에 타기 전 그는 신문에서 "이교도의 풍습인 밸런타인 데이 행사와 관련된 상업적 행위를 금한다"는 사우디 종교당국의 발표를 읽었다. "알라의 노여움을 피하려면 이교도 기독교의 풍습을 절대 따르지 말라"고 했다.

사우디의 일간 알리야드도 "밸런타인 데이는 결코 이슬람의 명절이 아니다. 이슬람 사원의 이맘(예배인도자)들은 젊은이들이 이런 서구의 풍습에 빠지지 않도록 지도하라"는 사우디 최고 종교지도자 압둘아지즈 알셰이크의 지시도 실렸다.

그러나 무스타파의 생각은 이렇게 한다고 막을 수 있겠나 싶다. 프랑스에선 히잡(머리를 가리는 베일)착용 금지문제로 반발이 거세다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많다고 들었다. 신문에서 파키스탄의 카라치 대학에서는 밸런타인 데이 축하 여부를 놓고 학생 간에 패싸움이 벌어졌다는 기사를 본 것이다.

남학생 한명이 여학생에게 "해피 밸런타인 데이"라고 말을 건네자 주변 학생들이 "이슬람 교리에 역행하느니 마느니"라고 말싸움을 벌이다 급기야 주먹질로 비화해 두 명이 부상한 것이다.

역시 외신이지만 이란의 거리에도 단속을 피한 '교묘한' 밸런타인 데이 영업이 성행 중이다. 상인들이 '밸런타인'이란 단어를 빼고 붉은색 포장만 해 팔아도 애들은 알 건 다 안다. 중년의 무스타파는 그런 세계와 힘겨운 씨름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무스타파는 "이런 경험이 사실은 처음이 아니다"고 말한다. 사우디 부임 전에 세 딸 중 두명이 히잡을 안 쓰겠다고 떼를 써 한바탕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는 개인의 자유"라며 부인까지 거드는 통에 그는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히잡을 계속 쓰겠다는 둘째딸 마하에게 그나마 마음을 붙이고 있을 뿐이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