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공산주의5년>1.東歐혁명은 실패한 도전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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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89년11월9일, 자유와 빵에 대한 동독주민들의 갈망은 동서분단과 냉전체제의 상징이던 베를린장벽을 무너뜨렸다.베를린장벽의 붕괴는 동유럽전역에 질풍노도 같은 혁명의 회오리를 불러왔고,독일 통일과 소련 붕괴를 거치면서 결국 냉전질 서의 해체로이어졌다.그로부터 5년,혁명의 뜨거운 열기와 함성이 사라진 동유럽 여러나라의 현주소를 특파원의 현지취재로 알아본다.
〈편집자註〉 더이상 갈라짐과 대립이 아닌 하나됨과 협력의 상징으로 다시 베를린 한복판에 서 있는 브란덴부르크문.
그 앞을 지나던 베를린장벽은 5년전 조각조각 무너져 내려 이제는 기념품노점상들의 좌판 위에서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주먹만한 크 기의 장벽조각이 20마르크(한화 약1만원).장벽과 함께 영원히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린 옛동독 인민군의 철모와 계급장도 냉전시대의 유물로 관광객들의 눈길을 끈다.
분단시절 황무지로 방치됐던 브란덴부르크문 남쪽 포츠담광장에선독일최대 다 임러 벤츠그룹의 새사옥을 짓는 우렁찬 망치소리가 들려오고, 바로 북쪽 舊제국의회에는 독일이 통일되던 날 게양된대형 독일국기가 늦가을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무대를 옮겨 폴란드 바르샤바 중심가에 위치한 인민문화궁전 앞.「바자르」라고 불리는 노점상 수십개가 식료품.가전기기.옷가지.운동화.생활용품등 온갖 상품을 갖춰 놓고 손님을 끌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식료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품이 독일등지에서 흘러온 외제다.
노점상 옆 마르샬街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절반 이상도 외제차였다.4년전 폴란드대통령선거 취재차 방문했을 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던 벤츠나 BMW등 고급승용차가 아주 흔해졌고 한국산승용차도 종종 눈에 띄었다.이 때문인지 골치가 아플 정도로 지독했던 4년전의 자동차배기가스 냄새는 많이 줄었다.거리의 모습도 한결 깨끗해 졌다.담배등 외국기업의 광고간판도 많이 늘었고전에 없던 햄버거가게도 여러군데 성업중이었다.곳곳에 건설.보수공사가 진행중이었고 빌라와 마크로 등 서유럽의 대형슈퍼 체인점도 바르샤바에 지점을 개설,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바르샤바교외엔 얼마전 골프장이 개장돼 주말이면 외교관.비즈니스맨들로 붐비고 있다.
같은날 밤 9시 바르샤바 중심가 뒷골목에 위치한 토플리스 바소피아.현란한 조명 아래 전라의 무희들이 선정적인 춤을 추면서자리를 빽빽이 채운 손님들의 흥취를 돋우고 있었다.여느 서유럽도시의 밤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5년전 동유럽 전역을 강타했던 민주화.시장경제화의 혁명이 일단은 이처럼 물질적.외형적 풍요를 가져왔다.
『이제는 없는 물건이 없습니다.그러나 너무 비싸 살수가 없다면 좋은 물건이 무슨 소용입니까.옛날엔 물건이 없었지만 이젠 돈이 없어 졌습니다.』바르샤바 중심가의 옷가게 쇼윈도에 걸린 가죽점퍼를 구경하다 4백만즐로티라는 값에 한숨만 쉬고 발길을 돌리던 한 여교사는 자신의 월급이 4백50만즐로티(약15만원)에 불과하다며 이렇게 말했다.그녀는 벤츠 600을 모는 졸부들이 급증하고 있는 반면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져 전체국민의14.4%인 5백50만명이 극빈층이라는 최근 세계은행의 자료를설명하기도 했다.이러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과 실업.물가고등으로폴란드 국민의 절반 가량이 개혁후 생활수준이 악화됐다고 느끼고있는 것으로 최근 실시된 여론조사는 밝히고 있다.
민주화.시장경제화 혁명은 이러한 부작용도 야기하고 있다.이는폴란드 만이 아니라 통일로 인해 가장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舊동독지역.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등 동유럽 어느나라나 마찬가지다. 『민의에 의해 사회주의정권이 무너진 곳에서 다시 40여년전 사회주의정권수립 당시의 동기인 부의 편재가 재현되는 것은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습니다.』폴란드에 자동세차기계를 수출하고 있다는 덴마크인 비즈니스맨 야콥센씨의 지적이다. 이처럼 부의 편재와 계층간의 갈등이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하면서「못살았지만 평등했던」과거에 대한 동경이 국민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으며 이 틈을 비집고 舊공산세력이 권력의 전면에 재등장하고 있다.
5년전 웅장한 팡파르를 울리며 시작된 동유럽혁명은 과연「실패한 도전」이란 이름의 미완성 교향곡으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
[바르샤바=劉載植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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