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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200.연희동 압박작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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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5共 청산 비밀보고서는 청산의 마무리 수순인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의 무조건 항복시기를 「(5共 청산 이슈가)국정감사를 통해 어느정도 여과과정을 거친 무렵」으로 잡았다.이에따라 6共청와대는 국정감사가 끝난 88년 10월말부터 5 共 청산에 마지막 박차를 가했다.
국정감사기간중 미국을 다녀온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은 국정감사가 끝난 3일후인 27일 갑자기 민정당대표와 국무총리이하 당정고위인사들을 청와대로 불러모아 조찬을 겸한 고위당정회의를 주재했다. 대통령은 이자리에서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과거의 문제』,즉 「5共비리문제는 5共의 잘못이지 6共의 잘못이 아니다」고 전제했다.그리고 당직자들에게는 정치적 해결을,장관들에게는 법적 해결을 촉구했다.
『민정당의원들은 5共 의원들이 아니라 새 공화국의 의원이라는입장에서 과거에 매달리지말고 잘못된 것은 과감하고 능동적인 자세로 소신있는 입장을 갖고 대처하라.』(당직자들에게) 『국회활동을 통해 불법으로 나타난 일에 대해서는 수사에 착수하여 부정을 척결하는 단호한 의지를 분명히 하라.』(장관들에게) 이수정(李秀正)공보수석은 이날의 갑작스런 모임과 대통령의 일갈에 대해 『조속히 처리해야할 문제점을 광범위하게 논의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청와대출입기자들에게 강조했다.사실상 5共과의 「의절(義絶)선언」인 동시에 본격적인 5共 청산 작업.연희동압박작전 개시명령이었다.
권력핵심부의 긴장감이 급격히 고조되기 시작했다.6共 청와대의5共 청산 주무인 최병렬(崔秉烈.현 서울시장)정무수석과 황태자박철언(朴哲彦)정책보좌관등이 참석한 대책회의가 연일 계속됐다.
비밀보고서의 내용과 같은 사과.재산헌납.낙향의 3대 원칙은 정해졌지만 완강히 버티는 연희동을 설득할 방법이 고민거리였다.
당시 6共 관계자 X씨는 3개 원칙의 불가피성을 강조한다.
그는 우선 「사과」에 대해 『문제해결의 전제로서 국민여론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가능한한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고 당연시했다.
다음 「재산헌납」의 불가피성에 대해서는 『재산문제 역시 全전대통령 자신이 자초한 결과나 마찬가지입니다.全전대통령은 13대총선때(88년4월)친한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선거자금을 지원해주었어요.청와대에서는 돈이 모자라 야단이었는 데 全전대통령이 당시 뿌린 돈이 수백억원대로 추정됐었습니다.
全전대통령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람들이 「나는 몇억 받았다」는등 떠벌리고 다녔기 때문에 소문이 확 났죠.그런 소문이 파다하니 「全전대통령은 도대체 돈이 얼마나 있기에 저렇게 뿌리느냐」는 비난여론이 생길 수밖에요.全전대통령이 실수한거 죠.돈을 뿌리지 말았거나,돈받은 부하들의 입을 막거나 했어야했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기에 6共에서는 재산헌납 없이는 여론을 잠재울수 없다고 판단했죠』라고 설명했다.그래서 국민들이 납득할만한액수로 잠정결정된게 「1백50억원 정도」였다고 한다.나중에는 「최소한 1백억원이상」으로 다소 축소되기도 했지 만….
마지막 「낙향」에 대해서도 X씨는 『연희동집이 아방궁이니 뭐니 말이 많았잖아요.全전대통령이 퇴임하기 직전 인근 민가를 사들여 개조하는등 부산을 떠니 역시 여론이 좋지않았죠.더욱이 집위치가 신촌 대학가 인근이라 대학생들이 「체포조 」니 뭐니 하면서 매일같이 데모를 해대니 도저히 어쩔수가 없었어요』라며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물론 5共쪽에서는 이같은 불가피성이 전부 6共의 「의도적인 여론조작의 결과」라고 주장한다.즉 불가피한 상황 자체가 국가원로회의법이나 올림픽참석건과 관련된 언론플레이처럼 6共 청와대가의도적으로 5共 청산 여론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全전대통령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압박작전의 선봉은 5,6共의 메신저 이원조(李源祚)의원이었다.崔정무수석은 李의원에게 연희동 설득을 부탁했다.全전대통령의 옆집에 사는 李의원은 부지런히 들락거리면서 어렵게 말을 꺼냈으나 혼쭐만 나고 말았다.全전대통령이 특히 알레르기성 거부반응을 보인 부분은 「낙향」이었다. 全전대통령은 어릴때 떠나온 경남 합천으로의 낙향을 귀양살이로 인식했던 것이다.그래서 한동안 메신저 李씨는 「연희동 출입금지」를 당해 제기능을 하지못했다.
이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盧대통령의 골칫거리를 해결해보고자 연희동을 찾았지만 다들 全전대통령의 서슬에 제대로 말도 꺼내지못한채 혼쭐만 나기 일쑤였다.
이무렵 5共 캠프에서「낙향」보다 더 심각한 거부반응을 보인 대목은「장기외유」권유였다.6共 관계자들은 외유권유 사실을 극구부인하고 있다.그러나 당시 5共 창구였던 안현태(安賢泰)前경호실장은 분명히 그런 권유가 있었음을 기억했다.
安전실장은『낙향 얘기가 나오기 전이었습니다.이름을 밝히긴 곤란하지만 분명히 6共 청와대의 뜻을 전달하고자 했던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장기외유를 권하더군요.그래서「말도 안되는 얘기다」고 단호히 거부했죠』라고 말했다.
다른 한 5共 관계자에 따르면 安전실장은 이 자리에서「단호히거부」를 분명히 하기 위해『각하(全전대통령)께서도 분명히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메신저니까 각하께 보고는 하겠다.만의 하나 각하께서 이를 수용한다면 그자리에서 권총을 쏴 각하도 죽고 나도 죽겠다』는 내용의 극한 표현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安전실장은 이날의 발언을「평생 각하께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고 후회한다고 한다.어쨌든 그정도로 감정이 격했었다는 얘기다.
安전실장이「각하도 거부할 것」이라고 확신한 것은 全전대통령이평소 이같은 상황을 예감이나 한듯『외국에 나가면 못돌아온다.그렇게 되면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며 이승만(李承晩)전대통령의 예를 들곤했기 때문이다.
***“각하도 거부할것” 11월 들면서 6共은 당정연합 총력전에 돌입했다.비밀보고서대로「全전대통령의 자진해명을 분수령으로특위활동을 88년으로 종결하고 89년부터는 정국의 관심사를 외교.남북문제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시한이 촉박했다.마침 盧대통령은 3일부 터 14일까지 동남아순방을 떠났다.
6共 관계자들은「외유기간중 연희동문제를 마무리하라」는 지시가따로 없었다고 하지만 5共 관계자들의 주장처럼 6共이「외유중 마무리」를 서둘렀던 것은 분명하다.
盧대통령이 순방을 떠난 바로 다음날 黨쪽에서 가장 먼저 나선사람은 최고위 인사인 윤길중(尹吉重)대표.尹대표는 全전대통령이5共을 출범시키면서 영입한 舊혁신계 정치원로다.그는 盧대통령이떠난 바로 그날 오후 고위당직자 회의에서 박 준병(朴俊炳)사무총장의 권유를 받고 다음날인 4일 아침 일찍 연희동을 찾았다.
尹전대표는『朴총장뿐 아니라 崔정무수석 등으로부터도 계속「빨리해결해야 하는데 全전대통령이 버텨 곤란하다」「당에서 적극적으로나서야한다」는등 간접적 요구가 있어왔죠.그렇지만 전부 全전대통령한테 신세를 졌으니 싫은 소리를 할 배짱들이 없었죠.그런 소리가 결국 나보고 나서라는 얘기같더군요.盧대통령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고 말했다.
그의 기억을 들어보자.
尹대표 역시 직접적 언급은 피했다.대신 태풍얘기를 꺼냈다.
『지금은 태풍이 불고 있습니다.태풍이 불면 누구나 먼저 숨고보지요.제 목숨 보존하기 힘든데 부모.형제가 보이겠습니까.그렇게 생각하시고 연희동을 떠나 수양하시는게….』 全전대통령이 정색하며『노태우 명령받고 온 겁니까』라고 물었다.
尹대표는『아닙니다.제가 자진해 왔습니다』고 답했다.
全전대통령은『내가 노태우와 직접 얘기해야 풀릴 문제입니다.尹대표는 잘 모르십니다』고 단호히 말을 막았다.
尹대표는 全전대통령의 단호한 태도에 아무 소득없이 연희동을 나서야했다.그리고 그날밤 플라자호텔에서 朴사무총장과 崔정무수석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비공식 당정회의에 참석해 방문결과를 설명했다가『모호하게 얘기해 오히려 일을 어렵게 만 들었다』는 면박을 들어야했다.
***鄭鎬溶씨 특사 자임 尹대표의 실패소식을 듣고 다음날 자진해 연희동 특사로 나선 사람은 정호용(鄭鎬溶)의원이었다.6共의 창업공신이자 全.盧 두 대통령의 친구였던 그는 당시 차기 당대표자리를 꿈꾸고 있었기에 난제해결에 한몫하고 싶었던듯 하다.오랜 친구사 이였던지라 좀 더 노골적으로 나왔다.
『어차피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아닙니까.대통령까지 지냈으니 모든 것을 툭툭 털고 연희동을 떠나는게 좋겠습니다.여기 있으면 자꾸 학생들 데모의 표적이 되니 시골에 내려가든지….』 원래 全전대통령은 鄭의원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다.게으르고 거드름 피운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그런 鄭의원이 불쑥 나서 노골적으로 낙향을강요하니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全전대통령은『노태우와 나 사이에 누구도 나서지 말라』고 일축했다.5共 관계자들에 따르면 全전대통령은 鄭의원이 다녀가고 난뒤 몹시 불쾌해했다고 한다.
黨차원의 노력은 한계에 봉착했다.말로 안되니 힘을 쓸 수밖에없었다.「권력의 칼」검찰이 나서야했다.그러나 칼(검찰)로 살(친인척 구속)을 에는 아픔에는 全전대통령 역시 가만 있지만은 않았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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