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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연장 순례] 파리 오페라 코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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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당시 프랑스에서는 연극이나 오페라를 상연하려면 왕실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막대한 국가 예산과 함께 공연예술 상연 독점권을 부여받은 왕립 음악 아카데미(오페라)나 코메디 프랑세즈(연극)은 문화권력으로 급부상했다. 귀즈 공작의 눈에 띄어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파리로 건너온 장 밥티스트 륄리는 루이 14세의 춤선생으로 출발해 프랑스 최고의 궁정음악가가 됐다. 륄리는 1673년 루이 14세에게 궁정 오페라 극장의 무료 사용권, 오페라 상연과 작곡 독점권까지 얻어냈다.

파리에서 서민 취향의 오페라 코믹(opera comique)이 처음 등장한 것은 1640년. 륄리가 만든 그랜드 오페라의 매너리즘에 대한 반발과 풍자로 시작됐다.

1714년 12월 26일 아내를 잃은 한 백작이 왕립 음악 아카데미에서 오페라 코믹 상연 허가를 받아냈고 이듬해 로마 제국에 대한 풍자극을 상연했다. 생 제르맹 시장터에 있는 한 극장에 ‘오페라 코믹’이라는 간판도 내걸었다. 1752년에는 파리 왕립 음악 아카데미(파리 국립 오페라의 전신)에서 이탈리아 극단이 페르골레지의 코믹 오페라‘마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a)를 상연해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왕립 오페라에 대한 반발로 출발

1762년 2월 3일‘오페라 코믹’은 오페라 부파를 전문으로 상연하는 이탈리아 단체와 힘을 합쳐 부르고뉴 극장(Theatre de Bourgogne)극장을 개관했다. 시민들의 반응이 뜨겁자 왕실 건축자문을 맡고 있던 장 프랑수아 외르티에(Jean-Francois Heurtier)가 스와쇠이 공작(Duc de Choiseul) 소유의 저택 정원에 극장을 짓는게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해왔다. 공작의 가문 앞으로 박스석을 하나 분양해주는 조건이었다. 이렇게 해서 1783년 현재의 파리 오페라 코믹 극장이 있는 자리에‘살 파바르’(Salle Favart)가 들어섰다. 당시 객석수는 900석이었다. 오페라 대본 작가 샤를 에두아르 파바르에게서 극장 이름을 따왔다. 이때부터 오페라단은‘Theatre national de l’Opera-Comique’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1801년 오페라 코믹은 비좁은 살 파바르를 떠나 테아트르 페도(Theatre Feydeau)로 무대를 옮겼다. 28년 후 페이도 극장이 도로 계획에 걸려 헐리게 되면서 살 파바르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살 파바르는 ‘테아트르 이탈리엥’이라는 단체가 점령한 터였다.

오페라 코믹에게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1838년 1월 13일 살 파바르에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1840년 5월 16일 살 파바르 재개관과 함께 이곳으로 무대를 옮겼다. 극장 재건은 원래의 설계도를 따랐다.

비제의 오페라‘카르멘’ 초연 무대

19세기는 오페라 코믹의 전성기였다. 작곡가 아돌프 아당, 조르주 비제, 쥘 마스네 등의 활약으로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 토마의 ‘미뇽’(1866년)이 가장 대표적인 레퍼토리다. 지금도 베르디의‘아이다(Aida)’, 푸치니의‘라보엠(La Boheme)’과 함께 ‘오페라 흥행의 ABC’로 불리는 비제의 ‘카르멘(Carmen)’도 바로 이곳에서 초연됐다.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파리 오페라’와는 달리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도 있었다. 1719∼20년, 1722∼23년, 1745∼51년에 극장 문을 닫기도 했다. 1846년 12월 베를리오즈가 오페라‘파우스트의 파멸’을 이곳에서 초연한 다음 작품 제목대로 빚더미 위에 올라 앉기도 했다.

1887년 5월 25일 토마의‘미뇽’제1막이 시작될 무렵 극장 3층에서 또 화재가 발생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도 무대막을 내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700여명이 앉아 있던 객석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목숨을 잃은 60명 가운데는 무대에서 공연하던 여가수 1명도 포함돼 있었다. 건물도 잿더미로 변했다.

살 파바르의 재건축에는 11년이 걸렸다. 그동안 테아드르 데 나시옹(Theatre des Nations. 현재의 Theatre de la Ville)로 무대를 옮겼다. 1893년 설계 경기에서 루이 베르니에(Louis Bernier)의 설계안이 채택됐다. 뉴욕타임스 파리 특파원은 1893년 9월 11일자 기사에서 “마치 사무실 건물 같다”고 비꼬았다.

1898년 12월 7일 펠릭스 포레 프랑스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현재의 ‘오페라 코믹’이 개관했다. 프랑스 국가‘라 마르세예즈’에 이어 토마‘미뇽’, 비제‘미레이유’‘카르멘’, 들리브‘라크메’, 마세‘사계’중 서곡과 하이라이트가 공연됐다.

경영난으로 프랑스 국립 오페라에 흡수되기도

1930년 재정 위기로 프랑스 정부가 극장 운영에 개입했다. 1936년에는 ‘l’Opera-Comique de l’Opera de Paris’라는 길다란 이름을 얻게 됐다. 파리 국립 오페라의 부속 기관 또는 병설 기관으로 전락했다. 1971∼72년엔 극장 문을 닫았고 1974년에는 ‘오페라 스튜디오’로 불리면서 파리 국립 오페라의 배우 양성소가 됐다. 1990년에는 민영화가 되면서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고 2005년부터는 ‘국립’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건물 파사드는 희극과 비극의 가면으로 장식돼 있고 2층 벽감에는 음악과 시의 뮤즈신이 조각돼 있다. 꽃무늬로 장식된 프로세니엄엔 고대 그리스의 현악기 리라를 새겨넣었다.

파리 오페라 코믹은 2007년 7월부터 5년에 걸친 대대적인 개ㆍ보수 공사에 돌입했다. 예산은 4487만 유로(약 314억원). 7~11월 휴관을 이용해 엘리베이터 설치, 분장실과 에어컨 시설 확충하기 위해서다.

오페라 코믹은 청소년 관객 확보를 위해 입장권의 4분의 1을 15 유로(약 2만 5000원) 이하로 책정했다. 입장권의 47%가 30 유로(약 5만원) 이하다. 28세 이하나 학생, 단체, 실업자는 할인 혜택을 준다.

◆공식 명칭: Theatre national de l’Opera-Comique

◆개관: 1898년 12월 7일

◆홈페이지: www.opera-comique.com

◆건축가: Louis Bernier

◆객석수: Salle Favart 1216석, Salle Bizet 100석, Salle Berthier 150석

◆초연: 메윌‘이집트의 요셉’(1807년), 도니제티‘연대의 딸’(1840년), 베를리오즈‘파우스트의 파멸’(1846년. 연주회 형식), 비제‘진주 조개잡이’(1863년)‘카르멘’(1875년), 토마‘미뇽’(1866년), 들리브‘실비아’(1876년), 오펜바흐‘호프만의 이야기’(1881년), 들리브‘라크메’(1883년), 마스네‘마농’(1884년)‘베르테르’(1892년)‘신데렐라’(1899년), 샤브리에‘억지 임금’(1887년), 샤르팡티에‘루이즈’(1900년)‘줄리엥 또는 시인의 삶’(1913년), 드뷔시‘펠레아스와 멜리장드’(1902년), 뒤카‘아리안과 푸른 수염’(1907년), 라벨‘스페인의 한 때’(1911년), 풀랑크‘티레지아스의 유방’(1947년)‘목소리’(1959년)

◆주소: 5 rue Favart, Place Boieldieu, Paris

◆전화: +33 (0)1 42 44 45 47

◆교통: 지하철 Richelieu Drouot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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