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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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영석이가 눈짓으로 악동들을 교실 밖으로 불러냈다.
『드디어 때가 왔어.중요한 첩보사항이 있는데 어디 우리끼리 조용히 작전을 짤만한 데가 없을까.』 『목공소로 가지 뭐.한대씩 때릴 겸 말이야.』 『안돼.거긴 애새끼들이 야리(담배의 속어) 때리러 올 거라구.』 『남자놈들이야 좀 있으면 어때.우리끼리 이야기하면 그만이지 뭐.』 『아니라니까.이번 작전은 첫째도 보안,둘째도 보안,셋째도….』 말하다 말고 승규가 제풀에 킥킥 웃었다.승규는 웃다가 다시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왜냐 하면 말이야,생각해봐.요즘 학교에서의 우리 위치가 썩좋지 않다 이거지.이번에 건의서 파동만해도 그래도 반박문을 내준 계집애들 때문에 겨우겨우 넘긴 거 아니냔 말이야.그런데 이럴 때 또 우리가 사고쳤다는 게 소문나면 우리도 끝이야.학교는다 다닌 거다 이거야.』 『하긴 그래.우리야 고 계집애들을 골탕먹이는 거로만 생각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부모들까지 충분히 들고 일어날만한 일이라니까.정말 몸조심해야 한다는 말은 맞다구.
』 『그럼 좋은 데가 있어.기도실로 가면 되잖아.거기선 야리를못때리는 게 흠이긴 하지만,보안이라면 거기가 왔다지 뭐야.』 『주님이 내려다보고 계시는 곳에서 작전을 짠다…이거 참 뭔가….』 어쨌든 우리는 기도실에 가서 둘러앉았다.물론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은 장소였다.벽에는 예수님이 야한 복장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다.그래서 나는 속으로 예수님에게 속삭였다.
미안합니다 예수님.이번 작전만 치르고 나면 앞으로는 당분간 못된 짓 안하고 공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우리는 사실 상원이를괴롭힌 악마를 예수님을 대신해서 응징하려는 것 뿐입니다.예수님은 너무나 바쁘실 테니까요.
『자 말해봐.첩보사항이라는 거 말이야.』 『뭐냐믄,떡순이네가금요일 밤에 재수생들과 미팅을 갖는다는 거야.킹카 정도는 되는놈들인가봐.압구정동 노야집에서 저녁을 먹고 노래방인지 가라오껜지에 가기로 했다는 거야.』 압구정동 노바다야키집에서 저녁을 살만한 놈들이라면 돈도 좀 돌고 좀 놀줄도 아는 놈들인가 보다고 나는 생각했다.
『근데 정말 정확한 거야? 잘못하다간 우리만 병신되는 수가 있다구.어느 출처에서 흘러나온 첩보야?』 승규가 영석이를 다그쳤다.영석이가 씨익 웃었다.
『글쎄 틀림없다니까 그러네 쨔샤.내 뒷자리가 혜숙이 자리잖아.고것들 물리시간 한 시간 동안 계속 그 이야기더라구.집에는 금요일이 혜숙이 생일이라구 거짓말하기로 떡순이네 패들끼리 입을맞추기로 했다는 거야.난 그거 엿들으려구 제물포 가 설명하는 거 하나도 못들었다니까.』 『어이구 큰일났네.물리 때문에 서울대학 떨어지면 어쩌.』 『좋아.금요일이라면…저녁 먹구 노래방 가고 그러면 빨라도 열한 시는 돼야 집에 갈 수 있을 거야.우리도 사전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돼.고것들 집 전화번호를 미리 한번씩 확인해두고…가만히 있어봐,전화는 어디서 하지.어디 조용한 장소가 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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