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죽음부르는부실공사관리>5.입찰비리 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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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3월말 경기도하남시 신장우체국 신축공사 입찰현장-.서울체신청이 발주한 이날 공사입찰에서 전 세계 건설업계가 깜짝 놀랄만한 진기록이 수립됐다.
최종 예정가격이 2억5천6백50만원인 이 공사 입찰에 참가한69개 건설업체중 무려 6개업체가 낙찰선인 예정가의 85%수준에 딱맞춰 불과 1만원단위까지 똑같은 금액으로 응찰가를 써냈던것이다.신통력도 이쯤되면 마치 2백m거리에 서있 는 사람을 향해 총을 쏴 총알이 더도 덜도말고 귓구멍만 살짝 맞히는 기술과비견될 법하다.
이처럼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데 대해 발주기관에선 언제나『정부표준품셈(관급공사의 공사비 산출기준)과 정부 노임단가가 공개돼있기 때문에 비슷한 공사를 해본 경험이 있는 업체라면 거의 비슷하게 예정가를 산출해 낼수도 있다』고 둘러■ 다.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공무원들은 자기들 먹을 것이 줄어드는 쪽으로는 좀처럼 법규나 제도를 바꾸지 않는다』는 업계에서 나도는소문에 바짝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설계도면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무슨 업체의 어떤 자재를 얼마나 쓰는지도 모르면서 총 공사비를 만원단위까지 적중시킨다는 것은 근본부터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건설업체 견적팀 관계자들도한결같이 고개를 흔든다.
기절초풍할 사건은 또 있었다.같은 시기에 실시된 서울 정동우체국 신축공사 입찰에선 2억6천8백만원인 예정가의 85%에 정확히 일치하는 2억2천7백80만원을 써낸 업체가 4개사에 이르렀다. 견적실력이 이정도 경지에 이르면 빌딩의 겉모양만 보고도전체 공사비를 만원단위까지 알아 맞힐 수 있다는 얘기다.놀랍게도 우리 건설업계에는 이처럼 어마어마한 신통력을 지닌 견적의 천재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시피하다.
지난 7월 대한건설협회가 올들어 시행된 1백억원 미만규모 공사 2백14건의 입찰결과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의 35.
98%인 77건이 예정가의 85%와 정확히 일치하는 금액을 써낸 업체에 낙찰됐고 85~86%사이,즉 1%이내의 오차 범위내에서 써낸 업체에 낙찰된 공사가 전체의 꼭 절반인 1백7건에 이르렀다.말하자면 전체의 약 86%에 이르는 공사 입찰이 낙찰기준가격인 예정가의 85%선에서 단 1%의 오차도 넘지 않는 값에 낙찰업체가 결정된 것이다.
이처럼 천리안을 가진 천재들이 건설한 다리가 왜 무너지고 건물이 내려 앉는 것일까.제대로 돈을 들여 정밀시공을 해본 경험이 없고서는 칼로 두부를 썰듯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공사비를 뽑아 낼 수 없을 터인데 현실에서는 왜 이런 역설이 반복되고 있는가. 해답은 간단하다.공사 예정가를 적중시킨 것은 건설업체의견적팀이 아니라 바로 발주처의 공무원들이었던 것이다.
이는 현행 입찰제도를 조금만 주의해 뜯어보면 금세 나타난다.
우리나라 입찰제도는 공사비 1백억원 규모를 기준으로 그 이상은순수 최저가 낙찰제를 적용,무조건 낮게 써낸 업체에 낙찰되도록하고 있고,그 미만에 대해서는 지나친 덤핑을 막기 위해 예정가의 85%이상을 써낸 업체중 최저가 응찰자에게 시공권을 주고 있다. 문제는 바로 1백억원미만 규모 공사 입찰에서 빚어진다.
낙찰기준선이 예정가의 85%이므로 예정가만 알면 낙찰은「떼놓은당상」이 되고 만다.따라서 업체들은 예정가를 사전에 빼내기 위해 혈안이 되지 않을 수 없고,이 뒤에 시커먼 양심의 공무원들이 슬슬 미끼를 끼운 낚싯줄을 풀었다 당겼다하며 뇌물액수에 따라 예가(豫價)를 흘리는 탈법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로 시끄러워지자 주무부처인 재무부에서는 지난해 3월부터 최소한 2개이상의 예정가를 작성한 다음 입찰현장에서 무작위로 공개추첨을 해 뽑힌 금액을 최종예정가로 하고 이를 기준으로 낙찰자를 선정토록 하는 묘안(妙案)을 내놓 았다.그러나이는 담당공무원들의 예정가 팔아먹기 장사를 더욱 용이하게 해주는 결과만 초래했다.
예정가를 하나만 만들어 둘 때는 범위가 좁기 때문에 탄로날 위험도 컸지만,복수 예정가격제가 도입되면서 표적이 분산돼 숨을구멍이 많아진 것이다.
또 A,B 두개의 예정가중 이 업체에는 A안,저 업체에는 B안을 팔아 공무원들의■배만 더욱 불리우는 결과만 초래한 것.
뿐만이 아니다.
복수예정가격제 아래서는 어느 안이 뽑히느냐에 따라 낙찰 기준가격도 달라진다는 점을 핑계로 만일의 경우 낙찰이 되지 않더라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오리발」 명분까지 덤으로 얻게 되었으니그야말로 비위공무원들에겐 일석삼 조가 아닐 수 없다.
부정을 막기위한 복수 예정가격제가 오히려 부조리를 사후에 합리화시켜 주는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지난 5월엔 이를 다시 보완, 예정가를 5개 만들어 놓고 이중 2개를 입찰현장에서 공개추첨해 그 산술평균치로 최종예정가를 정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더이상 정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이 제도에도 허점은 있었다.
문제는 5개 예정가간의 오차범위가 1%를 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5개중 최소한 2개만 확보해 평균값을 산출하면 어떤 경우에도 낙찰 기준가격의 1% 범위내에 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입찰업자와 공무원간의 거래단위도 종전의 1 건에서 2건으로 늘어났다.
그러다보니 담당공무원이 팔아 먹을 수 있는 예정가의 상품배열만 무궁무진하게 늘려주는 또다른 부작용이 생겨났다.
종전엔 예정가격이 2개이면 2건, 3개이면 3건의 거래밖에 할 수 없었지만 5개중 2개를 팔아 먹다보니 짝짓기에 따라서 상품의 가짓수가 10여개로 늘어난 것이다.
예정가를 5개로 늘리기 전인 올해 4월 대한건설협회가 조사한59건의 입찰중 낙찰기준선인 85%의 1% 범위내에서 낙찰된 건수가 38건으로 전체의 64.4%였던 것이 5개로 늘린 후인7월에 와서는 그 비율이 86%로 오히려 늘었 다는 사실은 이를 입증해준다.
복수 예정가격제를 정교하게 다듬을수록 「예정가 팔아먹기」가 더욱 판을 쳤다는 것외에는 달리 설명되지 않는다.
***개선案에도 구멍 올해 건설수주물량이 49조9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이중 약 60%(92년기준)가 1백억원미만규모 공사이며,통상 예정가를 귀띔해주는데 5~6%의 커미션이 주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소한 1조원이상의 검은돈이 입찰과정에서 예 정가 누설에 대한 대가로 오고간다는 계산이 어렵지 않게 뽑힌다.
이같은 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해 건설협회에서는「예정가의 85%이상을 써낸 입찰액을 합산,평균치에 가장 가까운 금액」을 낙찰가로 하는 제한적 평균가 낙찰제를 도입해줄 것을 올들어 세차례에 걸쳐 당국에 공식 건의한 바 있다.
건설협회 백영권(白永權)계약제도과장은『예정가만 알면 1백% 공사를 딸 수 있는 현행제도하에선 공무원과 업체간의 검은 사슬을 끊을 수 없다』며『입찰금액의 평균치를 낙찰가로 함으로써 누구에게 낙점 될지 예측이 불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이 제도의 도입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6월에 개정된 예산회계법 시행령에는 이같은 건의가 가차없이 묵살됐다.『평균가 낙찰제를 도입하면 예정가 팔아먹기 장사도 볼장 다본다』는 업계의 냉소적 반응을 곰씹어보면 왜부조리를 없애는 쪽으로 제도를 바꾸지 않는지 짐 작이 가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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