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문화는 사치에서 출발하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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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 12면

신사동 포도 플라자 빌딩 지하에 위치한 와인 바 ‘뱅가’에서 담소를 나누는 이희상 회장(왼쪽)과 조태권 대표. [신동연 기자]

이희상 2년 전 할란(Harlan) 와이너리의 빌 할란씨 초대로 점심을 먹을 때였죠. 함께 있던 조 대표가 ‘2년 뒤에는 한국 음식을 가져와 대접하겠다’고 약속하더군요. 왜 2년 뒤일까, 궁금했지만 무심하게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1년 전, 조 대표가 ‘준비가 다 돼 가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美 와이너리들에 화려한 한식 대접한 이희상 회장과 조태권 대표

조태권 고급 와인을 마시는 자리에는 최상의 음식이 존재하고, 그것을 즐기는 부호들이 있죠. 이번에 초대했던 나파밸리의 포도밭 주인과 와인제조업자 60여 명은 그 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주역이고, 미국의 상류층 및 세계 식문화를 이끌어가는 오피니언 리더들입니다. 그들에게 한국 음식의 매력과 가치를 인정받아야 우리 식문화가 세계
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000여 점의 광주요 도자기가 새로 구워져 나파밸리로 옮겨졌다. 육수는 물론 식재료 일체가 조 대표가 운영하는 고급 한식당 가온의 요리사 여섯 명과 함께 비행기를 탔다. 순한 초고추장으로 드레싱한 생선회 샐러드, 랍스터 떡볶이, 게살, 김치, 생선을 이용한 삼색전, 등심구이, 홍계탕 죽이 메인 요리였다. 백자 혹은 청자 그릇 위에 한 폭의 그림처럼 놓였던 이날의 모든 메뉴는 조 대표가 직접 기획한 것이다.)

조태권 이 중 가장 신경 쓴 게 바로 떡볶이입니다. 대한민국 누구나 좋아하는 대중음식이면서 가장 전통적인 음식이 떡 아닙니까? 이번에는 서양인들의 입맛을 고려해 랍스터와 간장소스로 요리했지만 다음 번에는 쇠고기와 고추장을 쓸 겁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떡볶이를 그들도 좋아하게 만들 겁니다.

이희상 음식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귀하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했죠. 한국 음식에 대한 답례로 그들은 귀한 와인들을 내놓았습니다. 특정 와이너리의 와인을 지정할 수 없어서 와인은 각자 준비해줄 것을 부탁했는데, 쉽게 공개하지 않는 오래된 가주(佳酒)들을 가져온 겁니다. 그들끼리도 아마 처음 맛보는 경험이었을 겁니다.

(한국 음식과 미국 캘리포니아산 와인이 테이블 위에서 어울리자, 손님과 주인 또한 경계 없이 친구가 되었다. 오크통처럼 근엄하기만 했던 나파밸리 사람들의 표정이 아이들처럼 들떴고, 이들의 쏟아지는 박수 권유로 이 회장과 조 대표는 노래도 열창했다.)

조태권 난 한국 음식을 계속 사랑해달라는 구애의 마음으로 ‘let it be me’를 불렀고, 형님은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신해서 사랑해 당신을’을 불렀죠.(웃음)

이희상 행사 다음 주에 뉴욕에서 열린 와인 익스피어리언스(wine experience· 세계 주요 와인업자들의 대규모 박람회)에 참가한 직원이 말하는데, 이미 나파밸리 만찬 소문이 퍼져서 한국과 한국 와인관계자들에 대한 호감이 대단했다고 했어요. 만족스러운 첫걸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태권 왜 2년씩이나 걸렸느냐? 음식과 그릇, 그리고 술까지 모두 가져갈 계획이었으니까요. 단순히 ‘먹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총체적인 문화’로서 한식을 인식시키고 싶었죠. 그래서 1인분에 370만원이라는 비용이 들었고. 그건 사치가 아니냐, 물으면 나는 이렇게 답합니다. 문화는 사치에서 출발한다고. 우리의 고전 음악, 오페라, 미술, 건축… 모든 게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이 향유하던 정신적 사치였습니다. 그것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대중문화로 다양하게 발전해온 겁니다.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은 『미식예찬』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철학과 과학, 생리학, 고대사까지 두루 훑어 미식과 식생활사를 총괄한 사바랭의 이 한마디는 음식은 개인의 기호품이자 한 시대를 관통하는 ‘문화’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조태권 ‘한국 식문화 세계화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라는 주제로 지난 10월에 논문을 발표하고 전국의 강연장을 뛰어다닐 때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있어요. 왜 꼭 최고여야만 하는가? 최고는 가격으로 판단되는 게 아닙니다. 가치의 문제죠. 백자나 청자의 진가가 단지 그릇이라는 데 있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음식의 가격을 맛으로만 매길까, 재료와 도구 그리고 서비스까지 고려해서 정할까. 이것을 차별화하면서 최고의 기준이 만들어집니다. 한국 음식을 먹을 때의 예절은 무엇이며, 도구는 무엇을 쓰며, 이름 하나하나의 의미를 알게 하려면 우리의 식문화를 외국인들이 욕심 낼 만큼 아름답고 귀하게 만들어야죠.

(서양 영화에서 일식당은 꼭 드레스 코드를 맞춰야 하는 비싸고 특별한 곳으로 묘사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5000원짜리 백반집에서는 반찬 수가 많네 적네 까탈스럽고, 메인 디시 한 접시에 10만원이 넘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는 순순하다. 부끄러운 모순이다. ‘우리 스스로를 높이지 않으면 빛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조 대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조 대표가 한국 음식을 세계로 확장해 나가는 데 주력하고 있다면, 이희상 회장은 세계의 좋은 식문화를 한국에 소개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노력해왔다. 1980년대 중반, 절친한 선배에게서 와인을 음미하고 느끼는 방법을 배운 뒤부터 그의 와인 사랑은 순정한 모습으로 한결같다.)

이희상 와인이라는 문화 코드는 절대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독주를 마실 때 흔히 벌어질 수 있는 불편한 언행 없이 기분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주죠. 와인전문가들이 와인을 시음할 때는 언어로 그 맛을 표현하는데 이 언어들이 얼마나 정교하고 다양한지 아십니까? 향기를 표현하는 말만 100종이 넘어요. 각기 다른 향과 빛, 맛을 느끼고 말하고 상상하면서 서로의 생각도 나누는 게 바로 와인 문화입니다.

(인터뷰 처음, 이 회장의 손에는 신문이 한 장 들려 있었다. 와인 바에서 와인글라스를 빙빙 돌리며 향을 맡는 ‘데귀스타시옹’ 행동을 “와인을 좀 아는 척하는 이들의 피곤한 사치”로 몰아붙인 어느 작가의 칼럼이었다.)

이희상 왜 와인글라스를 계속 흔들어줘야 하는지, 알면 이런 소리 못합니다. 어느 나라의 문화든 제대로 알아야 해요. 그래야 바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죠. 한국 음식을 먹으면서 ‘포크 두고 불편하게 젓가락은 왜 써’라고 말하는 외국인이 있다면 속상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문화를 공유하고 즐기다 보면 새로운 세대의 문화는 또 자연스럽게 창출되겠죠.

(이 회장의 와인 사랑은 유명하다. 와인의 대중화를 위해 10년 전 칠레에서 ‘몬테스’를 비롯해 싸고 질 좋은 와인을 들여올 때부터, 유럽의 와인명가들을 돌 때도 이 회장은 일일이 직접 와이너리를 방문했다.)

이희상 와인은 그 집의 귀한 자식들입니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돈이 많다고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수십 년간 ‘애지중지 키운 귀한 딸’을 덜컥 직원만 보내 계약서에 사인하고 가져오려 한다면 우리 집에 신뢰가 가겠습니까? 잘 데려와서 좋은 사람들과 만나게 해줘야죠.

(인터뷰가 무르익을 무렵 누군가 귀띔했다. 아기 다다시의 만화 ‘신의 물방울’ 13권 한국편에 이 회장이 운영하는 ‘뱅가(Vin-Ga)’가 소개됐다고.)

이희상 건물은 가온이고, 실내는 뱅가더라고.(웃음)

조태권 거리도 가까워서 이젠 귀한 손님 대접할 때 당연한 코스가 됐어요.(웃음)
(아기 다다시의 ‘한국편’ 테마는 한국 음식과 와인의 마리아주다. 강한 개성을 가진 인삼과 김치에 어울리는 와인을 찾아내는 것이 주인공의 역할. 물론 주인공의 임무는 성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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