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은 현대인의 외로움을 닮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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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 18면

abstract space(추상 공간)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낸 것은 통합과 연결에 대한 인간 의지의 산물이다. 아무런 표지도 없는 땅 위에 생겨난 길은 지금 이곳과 저 건너편을 결합시켰다.

지하철 다시 보기 <8>

강과 바다에 의해 끊어진 길을 이어준 것은 다리다. 그러한 이음의 욕망은 터널로 이어진다. 물론 터널은 단지 에둘러 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그러한 근대 이후 모든 선형성의 욕망은 수많은 고속도로와 터널이라는 생채기를 이 땅 위에 새겨놓았다. 그와 동시에 지하의 터널은 단순한 결합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땅 위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땅속에 구현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전혀 다른 층위에 놓여 있다.

지하철의 탄생은 대도시의 발달과 그 궤를 같이한다. 그리고 지하철의 대부분은 터널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 지하철에서 터널이 차지하는 비중을 망각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터널이 우리의 시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터널의 입구 혹은 출구만 볼 수 있다. 터널에는 비상시에만 들어갈 수 있다. 평상시에 터널에 들어가면 과태료가 부과된다.
 
<화재 발생 또는 비상시>
○ 대합실 및 출입구 방향으로 나가기 어려울 경우에는 안내에 따라 터널로 대피하시는 것이 보다 안전합니다.
※ 터널 내부에는 비상조명등과 비상연락 전화가 설치되어 있으며, 화재 진화용 연결 송수관도 설치되고 있습니다 .
※ 평상시에 터널로 들어갈 경우에는 매우 위험하며 철도 안전법에 의거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

지하철은 각 호선마다 터널의 형태가 다르다. 그나마 어느 노선은 가끔 터널을 벗어나는 순간을 접한다. 강 위를 지날 때 잠시 해방감을 맛보거나 아니면 아예 모르거나. 사람들은 터널을 벗어나도 그 사실을 모른 채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다. 터널 속에서나 바깥에서나 그들은 똑같다. 지하철을 타는 순간 신체는 터널 속에 갇혀 있다.
지하철은 터널을 통해 도심을 왕래한다.

impression(인상)

마치 인간의 몸속을 흐르는 핏줄과 같이. 터널은 역과 역을 연결한다. 그것이 터널의 목적이고 기능이고 삶이다. 터널 자체의 여정은 전혀 없다. 지하철의 주인공은 지하철 노선도에 하나의 점으로 이루어진 개별적인 ‘역(station) 공간’이다. 역과 역 사이는 이름도 없으며 별다른 특징도 없다. 터널은 역과 역을 연결하는 자신의 노동을 ‘역’에 빼앗기고 말았다. 터널은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버렸다. 터널은 외롭고 슬프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고,/밤은 그 강력한 침입으로 나를 엄습했다./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내 화살의 활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벼렸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 ‘한 여자의 육체’ 중에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로 향하는 발걸음은 거대한 심연으로 향하는 것과 같다. 지하세계는 본래 암흑 그 자체이지만 인공의 조명으로 잠시 어두움을 감출 뿐이다. 암흑의 지하세계는 항상 공포와 맞닿아 있으며, 터널은 그 공포를 감추고 있는, 혹은 가두고 있는 미지의 영역이자 금기의 영역이다. 터널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며 타자에 의해서만 나타난다. 기차가 지나칠 때 터널은 비로소 잠시 깨어난다. 땅속 터널은 애매함과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어두움은 무의미의 공간으로 향한다.

금혜원의 작품은 ‘응시’한다. 터널을 응시하고, 터널에서 응시한다. 오랜 응시는 지하철과 터널을 통해 알게 되는 모든 의미를 제거하도록 만든다. 그 결과는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추상(abstract)’이다. ‘abstract space(추상 공간)’ 연작은 우리의 인식과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걸러낸 상태다. 거기서 맞닥뜨리는 것은 터널의 냉정한 얼굴이다. 터널은 그 어떤 것도 가슴에 품지 않는다.

모두 터널을 통과해 지나갈 뿐이다. 스쳐가는 삶의 고통과 슬픔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터널은 꿈쩍하지 않는다. 터널은 모든 외로움이다. 터널의 외로움을 통과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견딘다.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늘도, 올라간다.

‘impression(인상)’ 연작은 지하철이 터널을 지나가는 순간만을 보여준다. 작가는 터널로 들어가 가만히 서 있다. 바로 곁으로 커다란 소리를 품은 지하철이 지나간다. 지하철이 지나간 자리에는 소리 없이 빛의 잔상만 남게 된다.

터널은 머무르는 공간이 아니다. 승객들이나 지하철 모두 터널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때 터널은 아무 쓸모없는 잉여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역도 마찬가지다. 즉 터널에서 바라보는 지하철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 지하철 내부의 개체들은 소멸되고, 빛의 이미지만 흔적처럼 남는다. 우리는 비로소 비물질화의 순간을 경험한다.

터널의 형태는 도시 지하철의 끊임없는 순환 그 자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이 없는 듯 순환의 고리는 터널의 심연을 더욱 깊이 보여준다. 그 반복과 순환의 이미지는 운전실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운전기사의 하루는 지루한 반복의 연속이다. 대부분의 일상은 터널 속에 있다. 운전기사는 오랜 시간을 앉아 있다가, 가끔씩 앉았다 일어나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 행위는 터널을 순환하는 반복운동의 물질적 재현이다. ‘푸코의 진자’처럼 터널을 왕복하는 삶은 결국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현대 도시인의 삶을 그대로 닮아 있다.

터널은 어떤 목표나 방향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당연히 터널의 입구와 출구는 구분되지 않는다. 입구가 출구고, 출구는 또 다른 입구다. 지하철 터널의 반복과 순환 이미지는 곧 우리의 삶의 모습이다. 터널의 이미지는 현대사회에서 반복적인 패턴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과 닮았다. 오늘도 우리는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눈물을 흘리고, 위로를 받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권경우씨는 문화연구와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비평 작업을 하는 문화사회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이며, 금혜원씨는 이화여대 미대와 동대학원을 나온 뒤 ‘도시공간’을 주제로 작업하는 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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