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동안 얘기 들어줬을 뿐인데…” AIDS 돌보미’ 공무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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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봉구 보건소 허정모 방역팀장이 에이즈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40대 남성과 상담하고 있다. [사진=변선구 기자]

20일 오후 2시 서울 도봉구 쌍문동 도봉보건소 지하 1층의 한 사무실.

보건소 허정모(54) 방역팀장은 맞은편에 앉은 40대 남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 사이처럼 손도 잡고 웃기도 하면서 안부를 건넸다.

평범한 모습의 이 40대 남성은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다. 9월 말 현재 한국의 전체 에이즈 감염자는 4956명. 이 중 도봉구에 39명이 살고 있다.

허 팀장은 7년째 에이즈 환자의 친구가 돼 이들과 얘기를 나누고 보살피는 일을 맡고 있다.

1978년에 공무원이 된 그는 2000년까지 주로 방역과 보건소 행정 같은 일을 했다. 그러면서 에이즈 환자를 접했다. 구청에서는 에이즈 환자의 실태를 파악해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환자를 챙겨야 한다.

“직원들이 에이즈 환자를 상담하는 것을 계속 꺼려 일이 안 됐어요. 심한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안쓰럽더군요. 그래서 제가 자원해서 맡았습니다.”

처음 그가 에이즈 환자 상담을 맡겠다고 하니 주변에서 “정신 나갔느냐”고 했다. 하지만 아내와 아이들이 믿고 응원해 줘 그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에이즈 환자들 중 생활이 문란한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이 회사원 같은 평범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다. 그래서 사람을 피해 외톨이가 되기 쉽다. 가족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지 못한다.

허 팀장은 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넣는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치료제 구입에 드는 비용(월 20만~30만원)을 지원받고 마음을 나누기 위해 허 팀장을 찾아온다.

“처음에는 말을 꺼내지도 않더라고요. 그래서 밥도 같이 먹고 술자리도 자주 했더니 입을 열더군요.”

이들에게 허 팀장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소중한 존재다.

“밤 12시가 넘어서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전화를 걸어 울부짖는 친구도 있어요. 심지어 자살하겠다며 우는 친구도 있었지요.”

그는 이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바로 뛰어나간다. 에이즈 환자를 만나 위로하고 설득하면서 밤을 지새운 적도 수없이 많다.

이런 노력 덕에 허 팀장이 돌보던 감염자 중에는 갑자기 사라지거나, 연락이 끊기는 사람은 없다. 그는 “에이즈 감염자들에게서 ‘팀장님 덕분에 살아간다’는 얘기를 들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가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에이즈 환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다. 일부 직원들은 지금도 그와 식사하기를 꺼린다.

허 팀장은 “에이즈는 쉽게 전염되는 병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환자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이들을 위로해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허 팀장은 에이즈 환자를 돌본 공로를 인정받아 제20회 세계 에이즈의 날(12월 1일)에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받는다.

이수기 기자 ,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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