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이민생활 보며 인권 지킴이 꿈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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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하고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한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 이민와 구멍가게로 출발한 한인 가정의 2남2녀 중 막내딸은 어릴 때부터 이 같은 꿈이 있었다. 아이비 리그 명문대를 우등 졸업하면서 그 꿈은 사명감으로 굳어졌다.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뒤 힘없는 서민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무부 민권담당 검사를 지망한 그는 20년 만에 자신이 일해온 조직의 실무최고책임자에 올랐다.

15일 한인 여성으로는 미 연방 정부 최고위직인 차관보(법무부 민권담당)에 지명된 그레이스 정 베커(사진)가 바로 그다. 맨해튼에서 백화점을 운영했던 아버지 정해준씨와 어머니 임정원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씨는 스타이브슨트 고교를 거쳐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튼스쿨과 조지타운대 법학대학원을 각각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그는 워싱턴 법원 서기와 미 연방검사, 유명 로펌 윌리엄 앤 코널리의 변호사를 거쳐 법무부 민권국에서 근무해왔다.

저임금에 성폭행까지 당했지만 영어를 못해 항의 한번 못했던 아시아계 근로 여성들이나 변호사를 고용할 돈이 없어 속수무책이던 미국 서민들이 그의 도움으로 살 길을 찾았다. 그는 국방부 파견근무를 했던 2000년 6·25 당시 미군의 한국인 양민학살 사건으로 알려진 노근리 사건 특별 조사관에 임명돼 사건의 공정한 처리를 위해 노력도 했었다.

정 차관보 지명자는 미국에서 태어난 이민 2세지만 한국어가 유창하다. 김치와 고추장 등 한국 음식은 무엇이든 즐긴다. 그와 절친한 김상주 ICAS 자유재단 대표는 “그에게 ‘당신은 한국 토종’이라 말하면 ‘그렇게 불러줘 감사하다’면서 한국 혈통을 자랑스레 여긴다”고 전했다. 김 대표는 “정씨는 이민자였던 부모들이 인권 사각지대에서 어렵게 살아온 과정을 생생히 지켜봤다”며 "3억 미국 인구의 30%가 넘는 소수계 인권 향상에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미 연방 행정부에서 한인이 맡은 최고위직은 차관보로 정씨는 세 번째에 해당한다. 차관보는 미 연방 15개 행정부처에서 장관-부장관-차관에 이어 4위의 고위직으로 부처마다 많게는 수십 명까지 임명된다. 1999-2000년 고흥주씨(현 예일대 법대학장)가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를 역임했고 정씨에 앞서 완 김(한국명 김완주)씨가 최근까지 법무부 민권 차관보를 지낸뒤 퇴직했다.이 밖에 강영우 백악관 장애인위원회 정책위원이 차관보급 예우를 받고 있으며 국장급에는 전신애 노동부 여성국장이 있다. 부시 행정부 1기 당시 존 유(한국명 유 춘) 버클리 캘리포니아 법대교수가 법무부 법률담당 부차관보를 지낸 바 있다.

워싱턴=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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