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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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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지금이야 제 성(性)을 파는 행위로 많이 쓰이지만 윤락이란 말에는 적잖은 시정(詩情)이 담겨 있다. 그 말 자체는 원래 삶이 여의치 않거나 힘에 겨워 세상을 떠도는 경우를 일컫는 것이다.

이 단어는 무엇보다 백거이(白居易)의 작품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 그는 당(唐)대의 천재 시인이다. 지금의 장시(江西)성으로 좌천돼 사마라는 한직을 맡고 있던 무렵에 쓴 비파행(琵琶行)은 그의 작품 중 백미에 해당한다.

어느 가을 자신을 찾아왔다 돌아가는 친구를 배웅하려다 강가에서 듣게 되는 비파 소리. 그 주인공을 찾아 음악을 감상한 뒤 백거이는 여인의 살아온 행적을 듣는다. 수도 장안에서 잘나가던 기생, 그리고 나이가 들어 퇴기 취급 당하다가 먼 지방의 장사치 아내로 자리 잡게 된 사연.

고개를 떨어뜨리고 젊었을 적의 즐거웠던 추억들과 지금 실의에 빠진 초췌한 모습으로 남게 된 이력을 말하는 그녀에게서 백거이는 깊은 울림을 받은 모양이다. 자신 또한 덧없는 정쟁에 말려 지방의 한직으로 밀려난 신세였으니 말이다. 사실 마흔 셋 나이의 백거이에게 관직의 높고 낮음보다는 인생의 무상함이 더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민초들의 힘겨운 삶에 늘 귀를 기울였던 백거이는 그 순간의 공명을 이렇게 읊는다. “하늘 끝에서 유랑하는 다 같은 신세니, 만나면 그만이지 옛 사람 아니면 어떠랴(同是天涯淪落人, 相逢何必曾相識).” (지영재 편역 『중국시가선』)

절박한 삶의 환경이 만들어 놓는 하늘 끝, 그곳에서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는 상태가 윤락이다. 당초 성 매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단어로 쓰였던 것이다.

찬바람 부는 요즘 씁쓸한 소식이 들린다. 어느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주부와 여대생들이 몸을 팔기 위해 일본행을 서슴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돈벌이가 가장 큰 목적일 터인데, 그 배경의 상당수가 자식의 사교육비와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니 왠지 가슴이 더 서늘해진다.

돈벌이를 위해 이들이 일본인의 구타와 변태적 성행위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전언도 있다. 이쯤 되면 이 여성들은 제 몸을 파는 매춘의 행위를 넘어 하늘 끝을 떠도는 유랑자의 윤락 수준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이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소득 격차가 더욱 벌어지면서 생겨나는 현상인가. 그를 부추기는 세계화의 흐름이 우리 사회의 정상적 사고와 가치를 크게 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