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VS 영화] '라이언' - '태극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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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생 영화과 대학원생 강재규군. 그는 몇년 전만 해도 평범하기만 한 자신의 이름이 갖는 의미를 몰랐다.

그러나 '은행나무 침대'와 '쉬리'이후 한국의 스필버그가 되려는 자신이 강제규 감독의 이름과 이렇게 비슷한 것은 어떤 운명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며 이름을 지어준 부모에게 감사했다.

그러나 이 '이름 운명론'은 한 친구를 만나고서 좌절에 빠진다. 그의 이름은 '서필복. 내가 강제규라면 그는 스필버그가 될 운명을 타고났단 말인가. 믿기지 않는 슬픈 운명이여. 어쨌건 친구로서 라이벌로서 미워하며 가까워진 그들은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를 같이 봤다. 영화를 보면서 몇 번 눈물을 훔친 듯한 강군의 얼굴은 감동으로 얼룩져 있는데 서필복군은 왠지 불만이 있는 듯하다.

이름 때문에 제가 스필버그 사촌동생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서필복은 또 스필버그를 들먹이며 잘난 척해대겠지. 하지만 강군은 '태극기 휘날리며'야말로 서군에게 절대 꿀릴 필요 없다는 걸 확인시켜준 영화라 믿으며 자신만만하게 설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복(이하 서): 너 울었느냐?

강재규(이하 강) : 아니 뭐 울었다기보단…. 그렇지만 이 영화는 관객의 가슴을 흔드는 힘을 가진 거 같아. 강제규 감독이 '쉬리'에서 보여줬던, 남.북 대치상황과 사람 간의 애틋한 감정을 절묘하게 배치하는 대중영화 감독으로서의 능력이 정점에 오른 것 같던데. 넌 어땠어?

서: 글쎄. 난 계속되는 전투 장면이 좀 지루하던데. 자꾸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교가 되더라고.

강: 아니, 넌 그 전투 장면들이 '라이언…'보다 못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님 전쟁 속에 피어난 형제애가 기껏 병사 한명을 구하기 위해 위대한 군인들의 목숨을 주루룩 갖다 바치는 그 억지스러운 휴머니즘에 비해 못하다는 거야?

서: 물론 전쟁 장면의 리얼함은 '라이언…'을 뛰어넘는 부분이 있지. 난 '울트라 바이올런트(Ultra-violent)' 한 화면으로 관객의 가슴을 서늘케 하는 강감독의 장기를 알아. 거기에 '대중영화의 핵심은 멜로'라는 믿음으로 관객의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지. 하지만 '태극기…'는 스펙터클과 멜로라는 두 가지로만 영화를 채우려고 해. 그게 '라이언…'같은 영화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거지.

강: 도대체 무슨 소리야.

서: 난 강감독이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서 만들 수 있는 비극의 최대치가 어디인가를 구상해내고 여기서부터 영화를 출발시키는 것 같아. 이를테면 '쉬리'에서 연인 사이였던 한석규와 김윤진이 마지막에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다거나, '태극기…'에서 인민군 전사로 변신한 형 장동건이 광기에 사로잡힌 나머지 동생 원빈이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는 장면같은 거 있잖아.

강: 그게 강제규 감독의 장점 아냐?

서: 물론 그런 클라이맥스가 대중 영화로서 힘을 이끌어내지. 그런데 그 극적 상황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스토리나 캐릭터들이 많이 희생되는 거 같애.

강: 흠, 나도 장동건이 인민군이 되는 설정은 좀 무리가 있어 보였어.

서:영화는 형 진태가 동생 진석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미쳐간다는 단선적인 이야기에 의존하고 그 사이를 살육의 스펙터클로 채우고 있지. '라이언…'은 그에 비해 아주 차분하게 주연과 조연의 내면을 보여주면서 한명 한명의 이야기를 쌓아가고 있거든. 영화 속에는 평범한 교사에서 살육 기계로 변한 톰 행크스도 보이고, 총 잡을 줄도 모르는 번역병이 독일군 한명을 죽일 때까지의 변화도 그려지잖아. 이뿐인가. 라이언 일병을 구해야 하는 임무는 미워하지만 대장에게 충성을 바치는 부하와, 어머니에 대한 애증으로 갈등하던 위생병 등 전투에 참가한 여덟명 하나 하나의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면서 그들이 죽어나갈 때마다 관객은 그들의 인생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아파지거든. 근데 '태극기…'에서는 형제 주인공 말고는 조연이 보이지 않아. 대신 펑펑 터져나가는 폭탄과 총알에 누군가는 계속 죽어나가는데 관객은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게 되는 거지. 다소 코믹한 캐릭터의 공형진과 빨갱이를 증오하는 조연 등이 있긴 했지만 너무 단순해. 조연들을 살려내지 못하니까 영화는 잔인한 전투 장면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전개되는 거야.

: 하지만 난 그런 단순한 캐릭터들이 관객의 감정을 주인공에게 집중시키기 위한 감독의 선택이었다고도 보이는걸. 그리고 전투 장면을 단순히 살육의 스펙터클이라고 말하는 건 지나친 폄하 아닌가?'라이언…'도 끔찍하기론 그 분야에서 새 장을 열었잖아?

서: 난 '라이언…' 의 뛰어난 점은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관객이 하나도 놓치지 않게 보여준 점이라고 생각해. 전투 장면은 누가 누군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작전은 어땠는지, 그 작전에서 벗어난 군인의 돌발 행동이 뭔지 한눈에 파악하게 해주잖아. 그건 군인들의 캐릭터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촬영의 우수함 때문이기도 해. 전쟁 영화의 가장 큰 맹점이 그저 여기저기서 우수수 죽어나가는데 무슨 상황인지 관객은 어리둥절해지는 거거든. '태극기…' 역시 자막으로 무슨 전투였는지를 보여주긴 하지만 그 속의 디테일한 상황 설명이 부족하고 쏟아지는 총알을 귀신처럼 피해나가는 장동건만 보일 뿐이야.

왠지 서군에게 말발에서 자꾸 밀리는 듯한 강군. 그러나 강군은 굽히지 않는다. 자신의 눈물을 이끌어낸,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강제규 감독에 대한 자부심을. 그가 당당히 스필버그의 대표작과 대등하게 비교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감독이 된 데 대한 존경심을. 그리고 결심한다. 내 기필코 서필복보다 훌륭한 감독이 되리라. 말발로도 영화로도. 아니 서필복이 아니라 스필버그보다 더 이름을 떨치고야 말겠노라고.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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