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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엥겔계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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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Hermes)는 ‘전령(傳令)의 신’이다. 최고신 제우스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올림푸스 신전의 사자(使者)로 종횡무진했다. 뛰어난 지략과 외교술·세련미를 상징해 프랑스에선 그 이름을 딴 명품 패션 브랜드까지 생겼다.

인간 세계의 통신도 19세기까지는 ‘올림푸스의 전령’처럼 신화의 고고한 영역 같았다. 1844년 미국 워싱턴~볼티모어 간 ‘모스 부호’ 전신이 개통되기 전까지 통신은 수천 년간 특권·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특히 전령으로서 조류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방향감각과 귀소본능이 뛰어나 첨단 과학이 발달한 20세기 들어서도 애용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이 시속 수십㎞로 1000㎞ 이상 날아가는 ‘전서구(傳書鳩·전령 비둘기)’를 전략적으로 풀었더니 독일군은 맹금류인 ‘전서응(傳書鷹·전령 매)’을 띄워 비둘기떼에 맞섰다.

전서구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영국 로이터 통신의 파리 지국은 1848년 프랑스 신문의 뉴스·논설을 골라 번역해 독일 언론에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비둘기 발에 원고를 묶어 날려보냈다. 제법 장사가 돼 2년 뒤엔 독일과 벨기에를 잇는 전서구 통신사업에 착수했다. 로이터의 초석을 ‘비둘기 우체부’가 닦은 셈이었다.

통신 서비스는 이제 대중화 수준을 넘어 생필품이 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5년 우리나라 가계 지출 중 전화·인터넷 등으로 쓴 통신비 비중(5.4%)이 미국의 3배 이상이었다. 으뜸 생필품인 식료품의 지출 비중(25.9%), 즉 엥겔계수는 3년째 내리막인 데 비해 사람들이 ‘소통’하는데 쓰는 돈이 급증한 것이다. 하긴 휴대전화 가입자 수가 4300만 명, 가입률은 90%에 달한다. 휴대전화를 소지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사람이 많다. 재화의 중심축이 ‘물질’에서 ‘경험’으로 옮겨 가는 인터넷 시대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그럴싸한 해석도 있다. 소유권보다 접근권을 사고파는 게 유망사업이 됐다. 바로 이동통신 같은 산업이다.(제러미 리프킨, 『접근의 시대』)

독일 통계학자 엥겔이 자신의 이름을 딴 엥겔계수를 창안한 지 꼭 150년이다. 먹는 데 들이는 지출과 삶의 질의 연관성을 규명해 오늘날도 요긴하게 쓰인다. 하지만 통신비가 식료품처럼 만만찮은 삶의 ‘고정비용’으로 자리 잡는다면 이제 틀을 바꿔야 할지 모른다. 한국판 엥겔지수라도 만들어야 할 판이다. 게다가 사교육비, 주택담보대출 이자 등 주변을 돌아보면 그런 고정비 항목은 지천에 널렸다.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