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와 투자 사이 … 오락가락 외자 정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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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2월 31일 정부는 제일은행을 뉴브리지캐피탈에 팔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헌재 당시 경제부총리(左)가 기자회견장에서 뉴브리지 아시아본부장 웨이지안 샨을 소개하고 있다. 뉴브리지는 99년 9월 제일은행을 인수해 국내 은행의 첫 외국인 주인이 되었다. [중앙포토]

외국 자본에 대한 일반적 평가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 자본의 역할을 묻는 각종 설문조사를 보면 '긍정적'으로 평가한 답변이 훨씬 많았다. 12~15일 경제.경영 학자와 증권업계 종사자, 기업인 등 경제전문가 208명을 대상으로 한 한국리서치 조사에서 97%가 지난 10년간 외국 자본이 한국 경제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답했다.

지난해 1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경제전문가 201명에게 같은 질문을 했을 때 긍정적이란 답은 78.1%였다. 두 설문조사를 직접적으로 비교하긴 힘들지만 경제전문가 집단에서 외국 자본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외국 기업인이나 외국 언론은 한국에 반외자 정서가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 경제전문가들이 외국 자본의 문제점으로 높은 배당 요구(한국리서치 조사.44.2%)와 투기적 행태(37%)를 꼽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론스타로 대표되는 투기자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뿌리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반외자 정서가 외국 자본 자체보다는 일부 투기자본의 부정적 행태와 과도한 이익 추구에 대한 반감이라고 볼 수 있다. 외국 자본의 제조업 투자는 바람직하지만 투기자본의 행태에 대해선 못마땅해하는 이중적 시각이 외국의 눈에는 반외자 정서로 비쳐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뉴브리지-소버린-론스타=투기자본에 대한 반감은 뉴브리지캐피탈의 제일은행 인수에서 비롯돼 소버린의 SK 공격에서 확산되었다는 게 연세대 박상용 교수(경영학)의 진단이다. 이어 지난해 론스타가 외환은행 매각으로 수조원을 벌어갈 상황이 전개되면서 외국 자본에 대한 시각이 악화되었다.

정부는 1999년 9월 제일은행 지분 51%를 5000억원에 뉴브리지로 넘겼다. 그러나 제일은행의 부실을 메워주기 위해 정부가 투입한 공적자금은 17조5632억원에 달했다. 부실이 발견되면 정부가 대신 책임져준다는 풋백(사후 손실 보전) 옵션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외국 자본에 질질 끌려다니는 정부의 무기력한 모습과 외국계 사모펀드의 횡포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3년 소버린은 반외자 정서를 키웠다. 2003년 4월 SK그룹이 SK글로벌 분식회계 등으로 흔들릴 때 사모펀드 소버린은 값이 내려간 SK㈜ 주식을 싸게 사들였다. 한국 법률을 철저히 연구한 뒤 1768억원을 투자해 SK의 지분 14.99%를 사들인 소버린은 2년여 동안 SK의 경영권을 위협한 뒤 9359억원의 이익을 챙겨 떠났다. 불과 1768억원을 동원한 외국 자본에 SK그룹의 경영권이 흔들렸다는 사실은 한국인에게 외국 자본에 대한 공포와 충격을 안겨줬다.

지난해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팔아 수조원 넘는 이익을 남길 상황이 벌어지자 '국부 유출론'이 제기됐다. 이런 분위기에서 2003년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과정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고, 급기야 감사원.검찰이 나서면서 결국 외환은행을 매각했던 정부 당국자와 당시 은행장이 법정에 서게 됐다. 투기자본감시센터,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를 무효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합법 행위도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합법적이지만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한다." 막대한 이익을 남긴 외국계 펀드들이 합법적 수단을 이용해 한국에서 세금을 내지 않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경제전문가의 79%(지난해 KDI 조사)가 이렇게 답했다. 반외자 정서의 한 축인 이른바 '먹튀' 논란이 일어나는 배경이다. 뉴브리지나 론스타가 수조원대의 이익을 남기면서 조세조약을 활용해 한국에서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으려 한 데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경제행위, 특히 펀드 등 금융자본의 활동에 대해 도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이 많다. 서강대 박영석 교수(경영학)는 "먹튀 논란은 다분히 민족주의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외국 자본 문제를 글로벌한 시각에서 보지 않고 국내적 시각에서 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서울대 최도성 교수는 "기업이나 자본의 활동은 도덕적 차원에서 평가할 문제가 아니라 효율 문제로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반외자 정서의 폐해=서강대 박 교수는 투기자본과 투자자본을 구별할 방법이 없다고 지적한다. 한국 기업이 해외에 진출할 때도 해외 기업을 인수합병(M&A)하거나 신규 법인을 설립하는 것 중 유리한 쪽을 선택한다. 외국 자본이 한국에 진출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외국 자본의 국내 기업 M&A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를 규제할 처지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연세대 박상용 교수는 "반외자 정서는 한국 기업과 자본의 글로벌 경쟁을 제약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서강대 박 교수는 "반외자 정서가 커지면 한국의 투자매력이 떨어지면서 포트폴리오 투자뿐 아니라 제조업 투자까지 줄어들게 만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정수 경제전문기자, 이세정 기자

◆사모펀드(PEF)=소수의 투자자로부터 거액을 모아 주식과 채권 등에 투자하는 펀드. 한국에선 론스타.칼라일.뉴브리지 등이 사모펀드로 널리 알려졌으며 세계 최대의 사모펀드로는 블랙스톤이 꼽히고 있다. 사모펀드는 자산가치에 비해 저평가된 기업을 사들여 구조조정을 한 뒤 되팔아 수익을 내곤 한다. 따라서 적대적 기업인수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외국의 경우 사모펀드에 대한 규제는 거의 없다. 불특정 다수로부터 소액을 모아 만드는 공모펀드와 달리 사모펀드는 몇몇 개인간의 거래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사모펀드도 증권당국에 등록하고 일정한 규제를 받아야 한다.

◆풋백 옵션=일정한 실물 또는 금융자산을 약정된 기일이나 가격에 팔 수 있는 권리를 풋옵션이라 한다. 풋백옵션은 풋옵션을 기업 인수합병에 적용한 것으로 본래 매각자에게 되판다는 뜻이다. 인수 시점에서 자산의 가치를 정확하게 산출하기 어렵거나, 추후 자산 가치 하락이 예상될 경우 주로 사용된다. 뉴브리지에 매각한 제일은행의 부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실 여신을 정부가 메워주는 것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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