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환율보다 경기 둔화가 더 걱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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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 19면

삼성전자는 환율변동에 따른 위험을 피하기 위한 ‘환헤지’를 하지 않는다. ‘환율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적극적인 위험 회피를 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삼성전자 관계자의 설명이다.

사업계획 시즌 …기업들 내년 고민은

“잘하면 이익을 보겠지만 잘못하면 큰 손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외환시장의 인프라도 아직 취약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이 헤징에 나서면 시장이 왜곡될 가능성도 큽니다. 대신 ‘환매칭’을 활용합니다. 거래선과 결제 통화가 다변화돼 있어 가능한 일이죠.”

환매칭이란 수출대금으로 받은 달러를 원화로 바꾸지 않고 보유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 달러로 결제하는 방식을 말한다. 삼성전자는 수출만큼 수입도 많이 한다. 다양한 나라에서 소재·장비를 들여와 완성품을 만들고 세계 각지에 파는 구조다. 환매칭은 이런 글로벌화된 사업구조를 활용한 자연스러운 위험관리 방식이다. 삼성전자는 환율이 10원 떨어질 때마다 영업이익에서 무려 3000억원가량 손실을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론적인 얘기다. “다양한 방식의 리스크 관리를 통해 손해를 줄여간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LG전자나 현대자동차 등 수출을 많이 하는 다른 대기업들도 정도만 다를 뿐 비슷한 방식을 활용한다. “장기간 환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면서 기업의 환리스크 관리 실력도 많이 늘었다”는 게 삼성의 얘기다.

꾸준히 ‘글로벌화 보약’을 먹어온 덕에 웬만한 외부 변수는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대기업의 체질이 튼튼해졌다. 긴장은 하지만 ‘비상 경영’ 등의 얘기까지 나오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100달러 고지까지 넘보는 유가에 대해서도 비교적 담담하다. “부담스럽긴 하지만 글로벌 시장의 경쟁자와 똑같은 조건이기에 크게 불리할 건 없다”는 게 상당수 업체의 반응이다.

현재 기업들은 내년 사업계획을 한창 짜고 있다. 최대 변수는 역시 환율과 유가다. 한 그룹 관계자는 “글로벌화가 근본적인 탈출구인 만큼 인수합병을 포함, 해외 투자를 늘리는 방안이 공통적으로 큰 줄기를 이룰 것”이라고 전망했다.

내성 강해진 대기업들

“한국이 더 이상 개발도상국이 아닌 만큼 원고(高) 현상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됐다.”

프레드릭 뉴먼 HSBC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내년 ‘원-달러’ 환율을 880원으로 예측하며 이렇게 지적했다. 업계는 이미 현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LG전자 관계자는 “내년 원-달러 환율을 800원대 후반으로 놓고 경영계획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동진 현대자동차 부회장도 얼마 전 “내년 환율을 880원으로 보고 사업계획을 짜고 있다”고 밝혔다.

유가도 이미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대비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유가 100달러까지 포함해 다양한 상황에 맞는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을 짜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가나 환율 모두 급등락만 하지 않는다면 그리 큰 변수는 아니라는 시각도 많다. 한 그룹 관계자는 “해외에서 원자재를 들여와 가공해 파는 게 국내 대기업의 일반적인 사업 패턴”이라며 “환율이 내리면 수출가뿐 아니라 수입가도 떨어져 상쇄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또 생산 거점이 해외로 분산돼 있어 환리스크를 그만큼 줄일 수 있다. 국제무역연구원 송송이 수석연구원은 “대미 수출만 해도 전체 수출량의 절반 이상이 국내 모회사에서 해외 자회사로 수출하는 기업 내 수출”이라며 “이런 구조가 환리스크에 직접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수출 지역이 다양해진 탓에 특정 통화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된 것도 강점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요즘은 환율 영향을 따질 때 단순히 미국 달러뿐 아니라 일본 엔, 유로화, 중국 위안, 대만 달러 등 5개 통화이상과 상관관계를 본다”고 설명했다. 고유가도 업종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오일달러’로 중동에 건설 붐이 일면서 국내 관련업체는 초호황을 누리고 있다.

실제로 환율과 원화의 ‘이중고(高)’ 현상이 장기간 지속되는 동안에도 수출은 꾸준히 늘었다. 장중 환율이 한때 800원대로 내려간 지난 10월 국내 자동차 업체들의 수출은 무려 30% 가까이 늘었다. 자동차 외에 반도체·석유화학 등 주력 6개 업종의 수출도 두 자릿수 증가세를 이어갔다.

문제는 모든 기업이 이런 내성을 갖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대한상의의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유가 감내 수준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난다.<표 참조> 삼성전자 관계자는 “환율문제도 대기업이니까 견디지 중소업체의 경우 정말 심각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경기 둔화 가능성에 촉각

내년 사업계획을 그리고 있는 LG전자 경영기획실은 최근 해외 현지법인과의 접촉이 잦아졌다. 시장 동향을 면밀히 점검하기 위해서다. LG전자 관계자는 “아무래도 미국·유럽 등 선진시장의 성장률은 예년만 못할 것 같다”며 “환율·유가보다 더 걱정되는 게 경기 둔화”라고 말했다. “그간 환율·유가 악재에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보면 세계 경기 호황 덕이었지만 상황이 바뀌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각 기업들의 내년 사업계획에는 보다 근본적인 고민도 담길 것으로 보인다. 바로 어떤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극한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현장에서 보면 중국은 물론 일본·대만 기업의 눈초리가 무섭게 느껴진다”며 “삼성이 몇 조원씩 벌어들이면서도 위기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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