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대선 닮은꼴, 어느 길로 가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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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 03면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17일 저녁 김경준씨가 조사받고 있는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김씨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최정동 기자]

“역사는 두 번 되풀이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독일 철학자 헤겔)

BBK 수사, 시간 촉박하고 ‘물증’ 위조 여부 판단 어려워

검찰의 한 간부는 BBK 사건의 핵심인물인 김경준(41)씨가 국내로 송환돼 온다는 뉴스를 접하고 이 말을 떠올렸다고 한다. 현재 등장하는 인물들이 과거 대선 때의 얼굴과 겹쳐지는 듯한 데자뷔(기시감·어디에서 본 듯한 느낌) 때문이다.

세간의 관심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주가조작 연루 의혹과 이 후보가 ㈜다스를 실제 소유하고도 공직자 재산신고 때 누락시켰는지에 대해 김씨가 어떤 주장과 자료를 내놓을지에 쏠리고 있다. 김씨와 이 후보의 물고 물리는 관계는 2002년 대선 때의 두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이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을 제기한 김대업씨다.

김대업씨는 2002년 7월 말 기자회견을 하고 녹음테이프를 병역 비리의 물증으로 제시했다. 그는 “이 후보 부인인 한인옥씨가 아들 병역 면제를 위해 2000여만원을 전달했다는 김도술 전 국군수도병원 원사의 진술이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한나라당은 “김씨의 조작”이라고 반박했다. 같은 해 10월 검찰은 “테이프 판독이 불가능하며 편집 가능성이 있다”고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으나 이미 이 후보에게 찍힌 병역 비리의 ‘낙인’은 지울 수 없었다.

이번 BBK 수사에서도 ‘물증’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김경준씨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를 미국에서 가지고 왔다고 밝혔다. 지난 8월 LA 연방 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김씨는 이면계약서의 존재를 언론에 공개하면서 “이 후보가 세운 LKe뱅크가 BBK와 EBK의 지주회사이며, 이 후보가 세 회사의 지분을 100%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라고 주장했다. 반면 이 후보 측은 “위조 전문가인 김씨가 조작한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검찰은 문서 감정을 통해 김씨 자료가 위조됐는지를 검증할 계획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이 후보 측은 “회사에 보관 중이던 대표나 이사의 인감을 김씨가 이 후보 몰래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검증에 시간이 걸릴 경우 “뒤늦은 수사 발표로 의혹을 부풀린 김대업 수사와 닮은꼴”이란 이 후보 측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검찰이 과연 대통령후보 등록개시일(25일) 전까지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검찰의 수사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다는 점을 감안해도 마찬가지다. 특별수사팀이 ‘이 후보 개입이 있었다’거나 ‘없었다’고 하려면 여야 정치권과 국민 다수가 납득할 만한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검찰 관계자는 “18일로 예정된 법원의 영장실질심사 때까지는 김씨 구속에 수사력을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엿새 남짓한 기간 중 얼마나 진상을 밝혀낼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25일 이전에 이 후보의 개입 여부를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할 때 검찰의 선택은 무엇일까. 그런 점에서 주목을 받는 이가 1997년 대선 당시 검찰총수인 김태정 총장이다. 같은 해 10월 여당인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은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365개의 차명계좌로 670억원대의 비자금을 관리해왔다”며 이른바 ‘DJ 비자금’을 폭로했다. 김태정 검찰총장은 이 폭로가 있은 뒤 10여 일의 장고 끝에 수사 유보를 결정했다. 그는 “대선을 2개월 앞둔 시점에서 이 사건을 수사할 경우 국가 전체가 대혼란에 빠질 게 분명하고, 수사 기술상으로도 수사를 대선 전에 완결할 수 없다”는 점을 이유로 내세웠다.

이번 BBK 수사에서도 수사를 계속할지, 계속한다면 언제까지 할지에 관한 입장을 검찰이 밝힐 가능성이 작지 않다. 법조계의 한 인사는 “투표권을 행사해야 하는 국민으로선 하루라도 빨리 결론을 알고 싶어 한다”며 “수사 계속 여부에 관한 입장을 밝히는 것은 국민에 대한 검찰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검찰의 입장을 퇴임하는 정상명 현 총장이 밝힐지, 아니면 새로 취임하는 임채진 차기 총장이 밝힐지도 관심사다. 임 차기 총장의 임기가 시작되는 것은 24일 0시. 검찰이 1차 시한으로 잡은 25일 하루 전이다. 검찰 안팎에서는 정 총장과 임 차기 총장 가운데 누가 발표하느냐에 따라 다른 입장이 나올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변수가 없는 한 임 차기 총장이 마이크를 잡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후보 측에서는 정 총장 퇴임 직전 이 후보 기소 움직임이 돌출하거나 확정되지 않은 사실이 흘러나올 가능성을 우려하면서 긴장감을 나타내고 있다.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 방식도 관심거리다. 이 문제는 지난 13일 임 차기 총장의 인사청문회에서도 쟁점으로 떠올랐다. 여야 의원들은 “도곡동 땅은 제3자 소유로 보인다는 식의 발표가 어디 있느냐”(민주당 조순형 의원),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 아들이) 고의 감량한 증거는 없지만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고 표현했다”(한나라당 나경원 의원), “어정쩡한 수사 결과는 내놓지 말아야 한다”(대통합민주신당 김종률 의원)는 의견을 제시했다. 발표 방식을 둘러싼 정치권의 의구심 역시 과거 수사의 데자뷔에서 비롯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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