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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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 13면

외환위기 이전 해마다 일자리 40만~50만 개 이상을 창출하던 한국경제는 요즘 30만 개도 창출하지 못하는 정체를 경험하고 있다. 오늘날 정치·경제·사회의 온갖 문제들도 실상은 우리 경제가 바로 쓸 만한 일자리를 충분히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고 있다.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탈출했다는 한국경제, 무엇이 문제인가? 지금의 한국경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경제발전 현상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멈추지 않는 논란 … IMF 처방은 틀렸다

한국이 개발시대 30년 가까운 기간에 이룬 연평균 8% 이상의 초고속 성장은 세계 경제발전사에 지울 수 없는 금자탑이다. 이는 스스로 돕는 자를 더 우대하는 차등과 차별화를 통해 혁신가들을 양산하고, 중소기업을 대기업으로 키워내고, 게으른 마을을 부지런한 마을로 바꿔내고, 가난한 자를 부자로 바꿔내고, 실패하던 사람들을 성공의 대열에 참여시키는 과정이었다.

그러면 1980년대 중반과 후반 이후 한국경제 개혁의 화두는 무엇이었는가? 바로 개발시대 성공의 밑바탕이었던 경제력의 집중과 불균형을 청산하는 일이었다. 경제력의 분산을 통해 경제 민주화를 이루고 균형발전을 통해 계층 간, 부문 간, 지역 간 균형을 이루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하는 정책목표다.

필자는 이를 일컬어 평등주의 함정이라 하였다. 중소기업이기 때문에 더 지원받고, 성공했기 때문에 특별히 규제 받는 대기업 규제정책, 가난하기 때문에 더 대접받는 농업 지원정책, 근로자는 약자이기 때문에 노조를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키워온 경영 민주화 정책, 수도권이기 때문에 규제 받고 지방이기 때문에 차별 없이 지원받는 균형발전정책, 서울에 있는 대학이기 때문에 지방대학에 비해 역차별 받는 제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을 역차별하는 교육평준화제도 등 혁신하고 흥하는 자를 역차별하는 경제·사회 모든 부문의 정책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정책들은 그럴듯한 정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발전의 이치에 역행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흥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빼앗아 감으로써 경제사회의 정체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체제 속에서 15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한국 기업과 국민들의 생존능력이 구조적으로 취약해졌음을 제대로 읽지 못한 상황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위한 급격한 무역과 금융의 대외개방, 높은 임금상승에서 비롯된 인플레이션 압력을 안정시키고 OECD 가입조건인 일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하기 위해 채택한 원화 고평가 정책은 더욱더 국내 경제주체들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이 결과 경상수지 적자가 쌓이고, 국내 차입이 규제된 대기업들이 너도나도 해외 차입에 나서게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여기에다 97년 들어 동남아 금융위기의 여파로 원화에 대한 평가절하 압력이 높아지는 데도 원화가치의 하락을 마지막 순간까지 방어하려 한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이 결국은 외환보유액의 고갈을 초래함으로써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80년대 중후반 이후 지속된 발전역행적인 평등주의 정책과 정부 환율정책의 실패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외환위기 이후의 개혁은 형식적으로는 기업·금융·노동·정부부문으로 나누어 시행되었으나 실상은 당시 외환위기의 주범이 국내 대기업이라는 희생양 삼기식 여론 속에서 그동안 청산대상이었던 경제력 집중의 주범인 대기업을 뜯어고치는 것이었다.

외환위기는 한국경제 개혁의 화두였던 경제력 집중을 청산하여 경제 민주화를 이루고 경제 균형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 준 셈이었다. 대기업에 대한 개혁은 대기업의 문어발 확장을 막는 규제를 강화하고,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 경영 방식과 지주회사 제도를 획일적으로 채택하도록 강요했다.

반면 중소기업을 대기업을 대체하는 세력으로 육성한다 하여 소위 벤처기업 육성정책을 시행했으나 실상은 무늬만 조금 바뀌었을 뿐 그 방식은 여전히 규모가 작아야만 지원받는 발전역행적 구조를 못 벗어났다. 외환위기 이전 15년여를 지배해온 평등주의 함정은 사라지기보다는 더욱 공고해지기 시작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사실상 평등주의 함정을 더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이제 강남 청산, 부자 청산, 서울대 폐지라는 레토릭은 물론 실제로 행복도시 건설 등 지방 우대정책과 수도권 규제의 강화 등 그동안의 정책에서 더 나아가 흥하는 자를 역차별하는 발전역행적인 정책들을 더 양산하고 있다.

외환위기는 기존의 잘못된 정책들을 바꾸게 하는 ‘위장된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정책들을 온존시키거나 심화시키는 ‘진정한 저주’였던 셈이다.


좌승희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UCLA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미니애폴리스 연방준비은행과 한국은행에서 이코노미스트(경제연구관)로 일하기도 했다. 현재는 경기도 싱크탱크인 경기개발연구원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특히 그는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부설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으로 부임해 2005년까지 근무했다. 그는 “되는 놈 발목 잡지 마라” 등으로 압축되는 그의 차별화 원리에 기반한 발전경제론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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