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黃長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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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다녀오리다. 2월 12일쯤 돌아오게 될 거요." "잘 다녀오세요."

1997년 1월 말 평양. 황장엽은 아내와 이 세상에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눴다. 꽃다운 시절 아득히 먼 모스크바에서 처음 만나 믿음과 사랑으로 함께 살아온 지 반백년.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인 황장엽은 무심한 표정을 지었지만 가슴속에 피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면서 돌아오겠다고 하는 자기 말이 참담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엔 주체사상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김정일 권력을 강화하는 데 앞장섰던 자신의 역사적 과오가 어른거린다. 마음속의 또 다른 자아가 단호하게 얘기한다.

'가족을 구해낼 수도 없으면서 미련을 갖고 주저하면 너는 끝내 못 떠난다. 그리되면 먼 훗날 역사는, 그때 북에서 엄청난 폭력과 불합리 속에 인민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당당하게 저항한 지식인은 단 한명도 없었다고 말할 것이다'.

아내에게 귀가할 것이라고 일러줬던 2월 12일 황장엽은 집 대신 베이징(北京) 한국총영사관에 들어갔다. 7년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황장엽 망명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황장엽 회고록').

황장엽이 지난주 한국인간개발연구원(회장 장만기)이 연 세미나에 강사로 나왔다. 정치적 해석과 이념적 판단을 가능한 한 중지하고 그의 얘기를 들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안락한 개인의 삶을 포기하며 독재정권과 외롭게 맞섰던 1970년대의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가 황장엽에게서 느껴졌다. 함석헌.장준하.김수환이 그런 지식인들이었다.

황장엽은 목전의 악에 대해 평론이 아니라 행동하는 지식인이 절실하다고 역설했다. 김정일 독재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구체적 계기는 95년 자기 눈으로 확인한 고급기술자 2천명의 집단 아사사건이었다. 그는 "김정일에게 봉사했던 과거는 내게 원죄 같은 것이다. 그걸 속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북한 민주화에 진력하겠다"고 했다.

북한 민주화를 위해 평화를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식의 주장엔 선뜻 공감하기 어려웠지만, 황장엽을 수구.냉전세력을 대변하는 친미.반북주의 선동가쯤으로 보는 시각은 깊은 관찰이 아닌 것 같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