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과문화

포도주는 그저 포도주인데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얼마 전 몇 사람과 와인 바에서 포도주를 마실 때였다. 오가던 대화가 끊겨 잠시 어색한 순간에 갑자기 어둑한 조명 아래로 와인 잔을 열심히들 흔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너무나 똑같이 너무나 열심히 흔들어대는 모습이 숭늉 마시기 전에는 다리를 꼭 떨어야 한다고 듣고는 열심히 다리 떠는 외국인들 같았달까. 무척이나 우스꽝스러워 보였던 것이다. 그나마 그건 와인 주법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나도 잘못 알고 있었지만, 잔을 흔들어 알코올을 휘발시켜 향을 더욱 강하게 하는 것은 첫 잔으로 족하다 한다. 어쨌든 주법 때문이 아니라 순간적인 장면이 우스웠던 그때, 앞으로 와인 잔 흔드는 사람 볼 때마다 다리 떠는 게 연상될까봐 좀 걱정이었다.

요즘 열풍이란 말을 붙여도 되지 않을까 싶게 포도주가 인기다. 눈 돌리는 곳마다 포도주에 대한 기사와 글이 넘쳐나고, 눈 닿는 곳마다 와인바다. 와인바 아닌 레스토랑들도 대부분 다 와인 리스트를 갖추고 있다. 덕분에 기업의 접대 문화도 폭탄주에서 포도주로 바뀌어 가면서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본다고도 한다. 와인이 혈압 등 건강에 좋다는 것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본고장인 프랑스에서는 포도주로 병을 고치려 했던 민간요법만 수백 가지였다고 한다. 그중엔 독감에는 환자의 침대 발치에 막대 빗자루 하나를 세워 놓고 그 빗자루가 두 개로 보인다고 할 때까지 계속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거나 탈장(脫腸)의 경우 24시간 동안 환자의 배 위에 놓았던 머리빗을 포도주 항아리에 담가 둔 다음 그 포도주를 한 모금씩 마시게 한다는 식의 어이없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포도주에 대한 신뢰와 기댐이 오히려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리라. 그런가 하면 『술의 역사』를 쓴 피에르 푸케에 의하면 ‘반 고흐는 가끔씩 그의 붓을 포도주에 적심으로써 근심거리를 환한 태양같이 만들었다’고 한다. 포도주에 혀 대신 붓이라니! 그런 일화를 듣고서야 고흐에 대한 외경심을 포도주에도 옮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요즘은 갈수록 포도주 마시는 자리가 불편하고 피곤하다. 어느 날부턴가 포도주에서 자꾸 화학 성분 냄새가 맡아져서가 아니다. 포도주에서 암 유발 인자가 발견됐다고 해서도 아니다. 그보다는 귀가 아파서다. 유독 포도주 마시는 자리에서는 일상적인 대화보다 포도주 마시는 주법이며 라벨 독해법, 맛 감별 능력이나 시음 경험, 가격 등에 대한 얘기가 지나치게 길고 높고 크다. 때론 포도주 시음 대회나 소믈리에 자격증 강좌인가 싶을 정도다.

아무리 그 내력과 예술적 에피소드가 찬란하고 격조 있다 한들 포도주 역시 하나의 기호성 ‘알코올’일 뿐이다. 그리고 사실 각 나라의 전통주나 국민주 치고 그만한 내력이나 에피소드가 없는 술이 있을까. 그런데 유독 포도주만이 ‘신의 물방울’로 칭송되고, 심지어 대단히 격조 있는 인생이나 고급 문화에의 필수 통로인 듯이 다뤄지는 게 어딘지 미덥지 않고 불편하다. 권여선의 소설 『분홍 리본의 시절』의 주인공은 야채 위주의 웰빙 식생활을 내세우던 선배 부부에 대해 이렇게 중얼댄다. ‘나는 그들과 교제하는 내내 그들이 나보다 육류를 덜 즐기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중산층의 표지는 육류를 즐기지 않는 데 있다기보다 육류를 즐기지 않는다고 말하는 데 있는 모양이다.’ 포도주 역시 그 자체를 즐기는 것보다는 그 술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말하는 것이 신분적으로나 문화적인 우월성을 드러내는 한 방편이라고 착각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러니까 그것 역시 외형적인 품격을 지향하는 허위의식의 한 도구로 유행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본격적으로 첫눈에 대한 설렘이 시작될 때다. 벌써 송년 모임을 알리는 안내장들도 날아든다. 그런 자리들이 포도주로 해서 더욱 빛날 수도 있지만 우스꽝스럽거나 공허하고 허황해질 수도 있다. 그러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제1의 와인 주법은 ‘아는 척하지 않기, 아는 척에 주눅 들지 않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경미 시인·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