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저를찾아서>10."중국의붉은별"저자 에드거 스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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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에드거 스노는 1905년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의 한 인쇄업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미주리대학과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한 스노는 세계일주의 꿈을 꾸며 고향을 떠나 1928년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신문기자가 된 스노는 13년간 중국에 머물며『차이나위클리 리뷰』『뉴욕 선』『런던 데일리 헤럴드』등 여러 신문의 기자 및 특파원으로 중국 대륙을 비롯한 아시아의 움직임을 광범위하게 보도했다.
1932년 베이징에 정착한 그는 연경대학 근처에 살며 본격적으로 중국을 연구하고 중국어를 익힌다.
그 과정에서 그는 쑨원의 부인 쑨칭링과 친교를 맺고 많은 중국 지식인과 작가들을 만났다.
1936년 그가 서방기자 가운데 처음으로 마오쩌둥의 봉쇄된「소굴」로 직접 취재여행을 떠나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도 쑨칭링이 써준 소개장 덕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중국 취재를 바탕으로 중국에 있을 당시 이미 여러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중국의 붉은 별』(1937)을 비롯『극동전선』(1933)『살아나는 중국』(1938)『아시아를 위한 투쟁』(1941)등이이 시기에 나온 책들이다.
태평양전쟁 발발에 따라 1941년 스노는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가 남긴 저서들은 미국인들이 중국공산세력의 진상과 실체를 직시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그의 분석과 조언이 미국정부의 정책에 반영된 것은 아니었다. 중국국민당 정부의 이른바「차이나 로비」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전쟁 이후 미국정부가 취한 중국에 대한 적대정책으로 중공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그의 제언은 무시되고 말았다.
1950년대 미국에 몰아친「매카시선풍」으로 그는 더욱 입지를잃게 됐고,말년에는 보수반공의 바람에 밀려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이주하는 개인적 고통까지 겪게 된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문이 꼭꼭 닫혀 있던 1960년대에 자유롭게 중국을 드나든 유일한 미국기자였다.
1970년10월1일 국경일 행사에 초대돼 천안문 광장에 마오쩌둥과 나란히 선 그의 모습은 미국이 중국에 빗장을 푸는 신호탄이 됐다.
닉슨 행정부는 이듬해 핑퐁외교를 통해 중국의 문을 두드렸고,그로부터 1년뒤인 1971년 2월 닉슨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이이루어 졌다.
기이하게도 스노는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던 바로 그 주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6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의 두번째 부인인 로이스 휠러여사는 그의 유골중 일부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베이징대학 구내에 묻었다.
문자 그대로 스노는 중국의 일부고,중국은 그의 일부로 남게 된 것이다.
스노의 첫번째 부인은 이름없는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생애를 다룬『아리랑의 노래』의 저자로 잘 알려진 님 웨일스였다.
둘은 1930년대 중국대륙의 변화를 현장에서 함께 지켜보며 서로 다른 대상을 잡아 공산혁명의 실체에 접근했던 것이다.
웨일스와 이혼한 스노는 1949년 뉴욕의 무대배우였던 로이스휠러와 재혼했다.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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