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를향한무비워>4."쉰들러 리스트"촬영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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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개방화의 열기로 새롭게 변신하는 바르샤바와 달리 시내 곳곳에학살과 공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중세도시 크라쿠프는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대로 한편의 영화가 되는 현장성을 지니고 있었다.바르샤바에서 서남쪽으로 3백50㎞.크라쿠프로 가는 국영 LOT항공기의 조금은 불안한 비행속에서 한 승무원은 『크라쿠프는 이제 역사현장이 두곳으로 나눠지고 있다』는 말로 세계적인 유적지가 단순한 관광지로 변해가는데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크라쿠프시청 관계자를 통해 만난 前국영영화사 직원이었다는 중년여인 에바(48)역시 첫마디에『진짜 역사를 원하세요,아니면 영화현장을 볼건가요』라고 물었다.최근들어 실제 역사보다 스티븐스필버그가 만들어낸 영화의 현장을 찾는 사람이 더 늘어간다는 게 폴란드 사람들에게는 못마땅한 표정들이다.
그러나『쉰들러 리스트』가 상영되기 이전에도 크라쿠프는 중세유럽의 3대 고도(古都)로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곳이다.
이교도들에 대항해 중세 그리스도교권을 지키는 최전선을 맡았던폴란드 야기에오왕조의 유물들이 2차대전 동안에도 거의 폭격의 피해를 보지 않은 채 남아있어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유적지로 선정된 역사도시의 당당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크라쿠프의 역사를 설명할 때 오랜기간에 걸쳐 형성됐고지금도 도시 전체에 배어있는 유대문화를 빼놓을 수 없다.
이곳에 유대인 집단거주지인 게토가 형성된 것은 6백여년전.이같은 역사는 60㎞가량 떨어진 근교에 나치 최대의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현지에서는 각각 오슈비엥침.브제징카라고부른다)를 들어서게 만들어 크라쿠프는 이미 학살 을 증언해야 하는 역사적.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여기에 스필버그가 다시한번 크라쿠프의 참상을 전세계에 알리는기폭제 역할을 해내면서 호텔입구는 물론 시내 곳곳에 관광회사들의 최소 8달러에서 최고 58달러까지 다양한 「쉰들러 리스트 투어」선전간판이 즐비하다.
에바는『지금도 유대인협회는 물론 개인적으로 당시의 참상을 전하는 활동이 끊이지 않는다』고 전하며『쉰들러 리스트』는 세계 영화계를 지배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뿌리찾기인 동시에 또 다른 복수극이라며 웃는다.
영화의 실제 로케현장이었던 게토지역은 시간이 멈춘 역사박물관으로서의 크라쿠프를 실감케 해주는 대표적인 장소.우중충한 벽돌건물,굳게 닫혀진 창문,지금도 주요 교통수단으로 사용되는 낡은전차,그리고 담벽은 물론 거리의 이곳 저곳에 학 살장소를 알려주는 추모비들이 널려있다.
현재 전자부품공장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쉰들러가 운영했던 독일법랑공장과 말을 타고 게토지역을 굽어보던 언덕,숲속의 작은 교회당등도 모두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 영화와 현실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주었다.
옛시가 중심에 자리잡은 생마리교회에는『쉰들러 리스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듯 했지만 회당 중간쯤에서 영화 속의 앵글을 손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일부 비평가들이 『쉰들러 리스트』에 대해「드라마투르기를 포기하고 폭력과 공포만 을 극대화해얻은 성공」이라거나 실전을 안방에서 보게 만든 걸프전을 본뜬「뉴스프로그램 같은 영상기법」일 뿐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크라쿠프에 남겨진 유물과 흔적으로 상상되는 50여년전의 공포는 결코영화 못지 않았다.크라쿠프의 관광이 아우슈비츠나 비르케나우에서벌어진 광기의 흔적을 보는것으로 마감하듯이 영화현장 역시 죽음의 공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물,비르케나우 수용소의 진입철로 게이트에서 끝을 맺는다.
폴란드 영화인들은 스필버그 이전에 크라쿠프의 역사적 증언을 스크린에 담은 폴란드판『쉰들러 리스트』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며항변이 대단했다.스필버그에 대한 평가야 어찌됐든 미국영화의 위력을 다시한번 과시한『쉰들러 리스트』는 반세기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생생히 보존된「학살현장」과 더불어 인류사상 최대의 악몽을고발한 홀로코스트의 대표작으로 남을 것만은 분명하다.
[크라쿠프(폴란드)=鄭淵秀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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