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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연장 순례] 드레스덴 젬퍼 오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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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 13일 밤 10시 14분 영국 공군기가 독일 드레스덴 상공을 가로질렀다. 베를린과 드레스덴, 켐니츠, 라이프치히 등을 폭격해 소련군의 독일 진격을 도와주기 위한 전략이었다. 옛 작센 공국의 수도로 동독의 정치적ㆍ문화적 중심이었던 드레스덴이 가장 처참하게 부서졌다. 연합군의 작전 이름처럼‘청천벽력’(Thunderclap) 같은 일이었다. 2월 4일 연합군 수뇌부가 얄타에서 만났을 때 영미 연합군은 이미 드레스덴을 폭격의 목표물로 결정한 상태였다. 2월 14일에는 미군기가 날아들었다. 대부분이 목조 건물로 돼 있던 드레스덴 시가지는 잿더미로 변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귄터 그라스는 드레스덴 폭격을 명백한 ‘전쟁 범죄’로 규정했다. 역사학자 막스 해스팅스는 ‘나치 독일이 저지른 것과 마찬가지의 끔찍한 실수’라고 했다. 영국 역사학자 프레드릭 테일러도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드레스덴 공습은 터무니없는 것이고 엄청나게 후회해야 마땅한 일”이라고 말했다.

1945년 연합군의 공습으로 불타

드레스덴 폭격이 정당한 군사작전인지 아니면 군사적으로 불필요했던 ‘전쟁 범죄’인지에 대한 논란은 접어두더라도 그 여파로 드레스덴이 간직해온 엄청난 문화 유산들이 파괴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엘베강의 피렌체’(Elbflorenz)라는 칭송을 받아온 드레스덴은 연합군의 공습으로 즈빙어 궁정, 성모교회와 함께 젬퍼 오퍼(Semperoper)가 파괴됐다. 젬퍼 오퍼는 건물 외벽만 남겨 놓고 몽땅 타버렸다. 작센 국립 오페라단은 1948년 연극 무대인 샤우슈필하우스(1913년 개관)로 무대를 옮겼다.

젬퍼 오퍼는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응급 조치만 한 채 20년 넘게 방치돼 있었다. 외벽은 살리면서 내부는 현대식 오페라 극장으로 새로 짓자는 의견도 있었다. 1975년 오스트리아 빈의 한 도서관에서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 1803∼79)의 설계도 원본이 발견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1985년 젬퍼의 설계안대로 복원

1977년 6월 24일 정초식을 거행한 후 8년만인 1985년 2월 13일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오페라‘자유의 사수’로 재개관했다. 1945년 폭격으로 파괴되기 직전에 이 극장에서 상연됐던 오페라다. 베버는 1817년부터 7년간 젬퍼 오퍼의 전신인 작센 궁정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지냈다.

개관 공연에는 동독 공산당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참석했다. 원래 재개관에 맞춰 지그프리트 마투스의 오페라‘유디트’의 세계 초연을 하려고 했으나 총감독 하리 쿠퍼가 베를린 코미셰 오퍼 총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유디트’도 베를린에서 초연했다.

세계적인 건축 음향학자인 레오 베라넥이 세계적인 오페라 지휘자 21명에게 ‘세계에서 가장 음향이 좋은 오페라 극장’에 대한 설문 조사를 했다. 1위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테아트로 콜론, 공동 2위는 드레스덴 젬퍼 오퍼와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이 차지했다.

작센 공국의 궁정극장이 효시

1841년 엘베강변에 들어선 젬퍼 오퍼는 베버의‘유리안테’로 문을 열었다. 1835년 젬퍼가 드레스덴 궁정 의 초청을 받았을 때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왕의 동상을 세우는 작업에 조언해주기 위해서였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궁정극장의 설계를 맡았고 드레스덴 왕립예술아카데미 건축학과 교수로도 활동했다. 괴팅엔에서 역사와 수학을 공부하고 뮌헨에서 건축을 공부한 젬퍼는 빈 부르크테아터를 설계한 사람이다.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와는 친구로 지냈다. 1849년 드레스덴 5월 혁명 때 젬퍼는 바그너와 함께 스크럼을 짜고 시내를 누볐다. 혁명 주모자로 체포 영장이 발부되자 바그너와 함께 유럽 각지를 떠돌면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젬퍼는 뮌헨에 지을 바그너 축제 극장을 설계했다. 건물의 파사드는 드레스덴 오페라 극장과 비슷했지만 내부는 발코니석이 없는 반원형의 극장이었다. 하지만 축제극장은 바이로이트에 들어섰다. 내부는 젬퍼의 설계를 대폭 참조했지만 외부는 검소하게 디자인했다.

초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젬퍼 오퍼는 1869년 9월 21일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마이어베어의 ‘위그노 교도’가 이곳에서 상연된 마지막 오페라였다.

드레스덴 시민들은 젬퍼에게 설계를 다시 맡겨 오페라 극장을 지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작센 공국의 왕 요한은 하는 수 없이 젬퍼에게 새 극장을 짓도록 명령한다. 젬퍼가 설계안을 그렸지만, 공사 현장에는 아들 만프레드를 보냈다. 공사 기간 중에는 1870년에 개관한 게베르베하우잘(Gewerbehausall)에서 오페라를 상연했다.

1878년에 재개관한 젬퍼 오퍼는 화재를 막기 위해 돌과 대리석을 많이 사용했다. 객석수는 1800석. 베버의‘축전 서곡’으로 막이 올랐다. Altstaedter Hoftheater에서 Koeniglisches Opernhaus를 거쳐 1919년 Sachsiche Staatsoper로 이름을 바꿨다.

바그너, R 슈트라우스 오페라 다수 초연

출입구 꼭대기에는 흑표범이 끄는 사두이륜(四頭二輪)마차 조각상이 디오니소스상과 함께 서있다. 인테리어 설계는 요하네스 실링 등 당시 유명한 건축가들이 맡았다. 출입문 위에는 볼프강 괴테, 프리드리히 쉴러, 윌리엄 셰익스피, 소포클레스, 몰리에르, 유리피데스 등 문호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무대막은 1875년 다름슈타트 출신의 페르디난드 켈러가 디자인한 것이다. 무대막 중앙의 그림은 프란츠 티펠이 그린‘열정의 횃불을 들고 있는 환상’이다. 극장 로비 곳곳에는 작가 에른스트 리첼, 에른스트 율리어스 하넬 등의 회화 작품들이 걸려 있다.

젬퍼 오퍼는 2002년 유럽 대홍수로 엘베강이 범람하면서 물에 잠겼다. 전세계에서 성금이 답지하면서 복구 공사는 순조롭게 끝나 그해 12월 재개관했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는 오페라 시즌이 끝나면 무대에 우아한 조명을 곁들인 음향 반사판을 설치해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단독 공연을 갖고 있다. 오페라 시즌 때는 오페라, 비시즌때는 교향곡.협주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인 셈이다. 프리츠 라이너, 칼 뵘, 오트마 스위트너, 주제페 시노폴리, 허버트 블롬슈테트 등이 음악감독으로 거쳐갔다. 1978년부터는 매년 5월 이곳에서 드레스덴 음악제가 열리고 있다.

◆공식 명칭: Sachsiche Staatsoper Dresden (또는 Semperoper)

◆건축가: Gottfried Semper(1803∼78)

◆홈페이지: www.semperoper.de

◆개관: 1841년(재개관 1878년, 1985년)

◆객석수: 1323석(입석 39석 별도)

◆초연: 바그너‘리엔치’(1842년)‘방황하는 화란인’(1843년)‘탄호이저’(1845년), 슈만‘피아노 협주곡 a단조’(1845년), R 슈트라우스‘살로메’(1905년) ‘엘렉트라’(1909년)‘장미의 기사’(1911년) ‘알프스 교향곡’(1915년)‘인터메조’(1924년)‘이집트의 헬레나’(1928년)‘아라벨라’(1933년)‘말 없는 여인’(1935년)‘다프네’(1938년), 뒤카‘아리아드네와 푸른 수염’(1907년), 블로흐‘맥베스’(1910년),부조니‘파우스트 박사’(1925년), 힌데미트‘카르디약’(1926년)

◆상주단체: Sachsische Staatskapelle Dresden, 드레스덴 음악제(www.musikfestspiele.com)

◆전화: +49 351 491 1705

◆소재: Theaterplatz 2, 01067 Dresden

◆교통: Tram 4, 8, 9 Theaterplatz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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