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하듯…'격렬하게 짧은 여행' 즐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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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단순히 도쿄 여행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첫 장을 읽으면서 혼돈에 빠져든다.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왠지. 이유 같은 건 없다. 바람에 이끌려, 꽃에 이끌려 한 동이 항아리를 안고 표연히 걸어가 보고 싶어진 것이다. 그런 일이 용납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일 관계의 약속이 몇 건인가 있고, 여기저기에 빚도 있다. 냉장고에는 먹다 남긴 닭고기가 들어 있다. 그것들을 그대로 두고 표연히, 여행을 떠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사회인으로서.”
발목 잡는 일상에 화자는 고민한다. 그래서 짜낸 타협안이 아침 일찍 떠나 그날로 돌아오는 당일치기 여행이다. 그는 이를 ‘격렬하게 짧은 여행’이라 이름붙인다.

이 책은 여행서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툭하면 하루짜리 여행을 떠나는 화자 ‘나’가 저자인지, 가상인물인지도 모호하다. 읽다보면 소설을 읽을 때처럼 무한한 상상력이 발휘된다.
장르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주인공 ‘나’의 우스꽝스럽고 재기발랄한 생각과 말투는 미소가 번지게 만든다. 강렬한 이끌림은 아니지만 시나브로 ‘나’에 빠져들게 한다. 거창한 주제나 클라이맥스, 흥미진진한 플롯 대신 소시민 ‘나’의 잔잔한 일상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지하철을 타고 혹은 걸으면서, 출퇴근하듯 하루짜리 짧은 여행을 떠나는 ‘나’는 이웃의 누구 같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모습 같기도 하다.

현실에서는 소심하고 생각 속에서는 격렬한 ‘나’. 무수한 혼잣말과 실행하지 못하는 공상으로 가득 찬 그의 여행은 실제로는 ‘별 볼일 없는 것’이지만 마치 ‘큰 볼 일’이라도 있다는 듯 차근히 진행된다. 생생한 묘사가 스토리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렇고 말고. 자신이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여행이야. 산책이라고 생각하면 산책이고. 이런 건 뭐든지 마음가짐에 달렸지.”
‘나’는 우리에게 일상 혹은 여행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를 선물한다. 슬랩스틱 코미디 같지만 단순히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나’의 혼잣말이 독자의 감각을 일깨운다.

저자 마치다 코우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1962년생으로 젊은 시절엔 펑크록 밴드의 보컬리스트로 활동했고 영화·드라마에 출연하기도 했다. 1992년 시집 『공화』를 출간하고 1996년에 첫 소설 『훌쩍훌쩍 다이고쿠』로 문학상을 받으면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시와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특한 문체로 자신만의 장르를 만들어 가고 있다.

프리미엄 이송이 기자
자료제공=랜덤하우스/ 02-3466-8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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