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가 보훈 훔쳐 먹는 국가보훈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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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공직 사회 기강이 아무리 해이해졌다 해도 이럴 줄은 몰랐다. 감사원 감사로 드러나고 있는 국가보훈처의 문란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정일권 전 차장은 서류를 위조, 국가유공자 자격을 딴 후 자녀들의 학자금과 취업 혜택을 받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런 사기 행각이 부처 차원에서 저질러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감사원이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전·현직 보훈처 공무원 87명으로 감사를 확대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국가보훈처는 나라를 위해 일하다 목숨을 잃거나 다친 군경과 유가족을 돌보는 곳이다. 여기서 근무하는 공직자라면 이에 걸맞은 최소한의 애국심이나 책임감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그런 덕목은 눈 씻고 찾기 어려웠다. 정 차장은 국가유공자 자격심사를 담당하는 보훈관리국장을 끝낸 지 겨우 두 달 후에 유공자 자격을 얻었다. 당시 심사위원 4명은 모두 보훈처 출신이었다. 한마디로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다.

이런 비리가 외부 감사에 의해 드러난 것은 보훈처 내부 조직이 얼마나 썩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방증이다. 공공연하게 비리가 저질러지는데도 이를 막을 통제장치는 하나도 없었다. 특히 ‘이래서는 안 된다’는 올곧은 목소리를 내는 직원도 한 명 없었다. 서로가 봐주며 이득을 챙기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정부는 이번 사태를 적당히 끝내선 결코 안 된다. 비리의 성격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정당한 국가유공자의 자격을 빼앗고 이들을 모욕했다. 나라의 정신을 통째로 오염시킨 장본인들이다. 나라의 위신과 품격을 땅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감사원은 이번 비리를 발본색원한다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이런 식의 비리가 다른 부처에는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정 차장이 허위로 유공자 자격을 따게 된 과정을 샅샅이 파헤쳐야 한다. 정 차장 이외에 연루된 직원이 나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벌하라. 정 차장에 대해서도 직권남용 등 형사고발할 혐의가 있는지 철저히 따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