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리뷰] 문학속 이미지 그림으로 풀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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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보름(35)씨는 장편소설 한 권을 서너 시간이면 읽어치우는 재주를 지녔다. 남편인 문학평론가 박철화씨가 자신의 게으름을 깨우칠 만큼 독서량이 많은 이씨가 그렇게 쌓인 문학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었다.

11일부터 17일까지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는 '텍스트에서 이미지로…'는 문학과 그림이 만나 일으키는 일종의 불꽃놀이다. 김훈.윤후명.문순태.김채원.심상대.윤대녕.배수아.윤효.권지예씨의 소설이 화가의 몸과 마음을 통과하며 불러일으킨 분출과 발효의 이미지가 장지에 먹과 채색으로 스며들었다.

김훈씨의 소설 '칼의 노래'를 텍스트로 한 그림은 검회색 격자 기하무늬가 무수히 마음에 그은 칼금의 벽화처럼 보인다. 짧고 진중한 낱말들이 칼날이 스치어 가듯 문장을 이루어가는 작가의 작법이 눈 앞에 그려진다. 눈송이를 밟는 듯 섬세하고 상처입은 단어들로 무장한 윤대녕씨의 작품 '눈의 여행자'는 하늘에서 바스라져 떨어지는 풀잎 비로 이미지를 얻었다.

이씨는 "줄거리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책을 덮고 난 뒤 그 전체를 가로지르는 핵심적인 이미지가 남는다. 회화가 불꽃과도 같은 점(點)이라면 문학은 그 불꽃이 터지는 자리에 도달하기까지의 선(線)이다. 소설의 핵을 이루고 있는 불꽃과도 같은 이미지를 그림으로, 나의 조형언어로 옮긴 것"이라고 밝혔다.

어린 시절 책읽기를 즐기던 외할머니 무릎에서 독서 습관을 키운 이보름씨는 화가인 어머니 송수련(59.중앙대 한국화과 교수)씨의 피를 대물림해 말과 그림이 통하는 도서관을 창조했다. 이씨의 전시회가 끝나고 나흘 뒤인 21일부터 28일까지 서울 반포동 예술원미술관에서 송씨의 '석주미술상' 수상기념전이 열려 모녀의 그림잔치가 이어진다. 02-736-1020.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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