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반자' 공 받은 박근혜 "내가 말하기 전 반응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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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11일 "박근혜 전 대표와 함께 정권을 창출하고, 동반자로서 함께 가겠다"고 밝히고 있다.강정현 기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11일 오전 11시40분쯤 측근으로부터 이명박 후보의 기자회견문을 전달받았다. 서울 삼성동 자택에서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회견문을 본 다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측근 의원들에게 "(내가 말하기 전까지) 반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박 전 대표 측 인사 대부분은 이 후보의 회견에 대해 아무런 평가를 하지 않았다. 유승민 의원은 아예 휴대전화도 받지 않았다.

이 후보의 기자회견에 대한 박 전 대표의 첫 반응은 12일에나 나올 것 같다. 박 전 대표가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이날부터 당의 공식 활동에 참여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회창 무소속 후보의 출마(7일)와 이재오 최고위원의 사퇴(8일) 이후 침묵하고 칩거해 왔다.

한 핵심 측근은 "박 전 대표가 12일부터 예정된 일정을 진행하며 외부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며 "기자들이 질문할 경우 이 후보의 회견을 포함한 각종 현안에 대해 의견을 표명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 측에선 두 가지 주장이 맞서고 있다. 하나는 "이 후보의 기자회견이 원론적 수준인 만큼 우리도 원칙적 대응만 하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후보가 저렇게까지 손을 내미는 데 잡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한 측근은 사견임을 전제로 "이 후보가 원론적 화합만 말했지, 구체성과 적극성이 부족해 보인다"며 "당 화합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박 전 대표와 이 후보의 신뢰 회복인데 오늘 회견에선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박 전 대표가 경선 승복 연설에서 백의종군을 말했고, 이후 상황 변화가 없다는 점도 분명히 한 만큼 한 번 더 원칙을 재강조하는 수준일 것"이라고 전했다.

반면 또 다른 주변 인사는 "이 후보가 자세를 낮춰 잘못을 인정하고 당권-대권 분리가 규정된 당헌을 잘 지키겠다고 한 만큼 변화의 조짐이 있는 것 아니냐"며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이 인사는 "다만 당권.대권이란 표현을 구체적으로 하지 않은 점은 아쉽다"고 덧붙였다.

박 전 대표는 이 후보가 참석을 부탁한 대구.경북 지역 필승 결의대회(12일 구미 개최)에 가지 않는 대신 비서실장을 지낸 유승민.유정복 의원을 보내기로 했다. 두 사람은 박 전 대표의 최측근 인사들인 만큼 당내에선 "박 전 대표가 이 후보에게 화답하려는 뜻을 표현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 이 대회에는 대구.경북의 친박 의원 10명이 모두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김무성 최고위원을 비롯한 박 전 대표 측 인사들은 경선 후 이 후보 측을 향해 "당권-대권 분리 원칙을 분명히 지키라"고 압박했다. 그런 만큼 박 전 대표가 이 후보의 기자회견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중대한 고비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박 전 대표가 12일 이후 대선 정국에서 어떤 행보를 보일지 관심사다.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박 전 대표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거셀 것이다. 이 후보 측은 "사실상 경선 불복이다"라거나 "이회창 후보에게 마음이 있는 것 아니냐"며 몰아붙일 가능성도 있다.

박 전 대표 측이 이렇게 여유를 보이는 이유는 뭘까. 아무래도 BBK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경준씨의 귀국 날짜(14~17일 사이)와 이회창 후보의 등록(25~26일) 같은 중대 변수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 측에선 "원칙을 중시하는 박 전 대표가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박 전 대표는 김씨의 귀국으로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이 급락할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러면 박 전 대표가 이 후보를 지지할 명분이 약해질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가영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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