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박근혜 '진정성 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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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분석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11.11 기자회견'의 핵심은 "후보 입장에서 박근혜 전 대표에게 줄 수 있는 건 다 줬다"(이 후보 측 핵심 인사)는 것이다. 회견문은 이 후보가 손으로 작성했다고 한다.

전날 오후 9시가 넘도록 서울 시내 모 호텔 31층 비즈니스룸에서 박형준.나경원 대변인과 한 줄 한 줄 읽고 고치는 작업을 했다. "대통령이 다 된 듯한 오만한 표현은 빼라"며 이 후보는 마치 연설문 작성팀의 팀장처럼 행동했다. 박 전 대표에 대한 '국정 동반자' '국정 파트너' 표현은 이런 과정에서 나왔다.

사실 '이회창 출마'의 위기 상황을 '박근혜 도움'으로 정면 돌파한다는 답은 지난 주말 일찌감치 나와 있었다. 이회창 후보 출마 선언 뒤 영남.충청권 표가 무더기로 빠져나가고 지지율이 하락하는 추세에다 BBK 핵심 인물인 김경준씨 송환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문제는 박 전 대표가 확인하고 싶어 하는 '진정성'이었다. 이 후보가 이재오 최고위원을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잘랐으나 박 전 대표가 감동하지 않은 것도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후보가 파악한 박 전 대표의 진정성 주문은 두 갈래였다.

8.19 경선 이후 점령군같이 굴었던 오만함을 인정하라는 것이고, 당정 분리 정신에 따라 후보가 당권.공천권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후보는 이 주문에 명쾌하게 답변했다. 경선 뒤 오만에 대해선 "내가 부족한 탓이다. 낮은 자세로 다시 시작하겠다"고 박 전 대표에게 사과했고, 당권.공천권에 대해선 "박근혜 대표 시절 만들어진 당헌.당규에 따르겠다. 대통령 직에만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박 대표 시절 만들어진 당헌.당규는 당권과 대권을 명확하게 분리하고 있다.'공천 지분' '당정 분리'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유권자에게 시장에서 거래하듯, 나눠 먹기 식으로 비쳐지는 것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노골적인 표현은 박 전 대표를 오히려 자극할 수 있다는 판단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진정성 게임'이 끝난 것 같지는 않다. 박 전 대표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 진영에선 이 후보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란 의구심이 남아 있다.

말대로라면 이 후보가 집권할 경우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의 공천권이나 당권을 행사하거나 '실세 국무총리'를 차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보장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또 하나 강재섭 당 대표의 임기는 내년 7월 말까지다. 이 상태라면 내년 봄 18대 총선을 강 대표 체제로 치르게 되는데 그가 '박근혜 지분'을 어느 정도 인정하겠느냐도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강 대표는 대표가 되는 과정에선 박 전 대표 사람이었지만 경선과 그 이후 과정에서 이 후보 쪽 사람이 됐다는 얘기가 박 전 대표 측에는 많다.

이날 이 후보의 '국정 동반자 선언'은 1997년 대선 때 DJP(김대중+김종필) 공동 정부나 2002년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를 연상시킨다. 동반자 약속이 집권 이후까지 지켜진 경우가 DJP 연합이고 중간에 깨진 게 노-정 단일화다.

박 전 대표는 97년과 2002년의 경우를 따져 가면서 이 후보의 진정성을 판단할 것 같다.

이 후보 회견문 작성에 참여한 박형준 당 대변인은 "미국 정치에서 '파트너'는 대통령-부통령 관계지만, 우리나라엔 그런 제도가 없어 그런 '정신'으로 함께하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를 당 대표나 실권을 가진 국무총리 이상으로 예우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서승욱 기자

◆당권·대권 분리 원칙=한나라당 당헌 제7조는 "대통령에 당선된 당원은 그 임기 동안에는 명예직 이외의 당직을 겸임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이 당권까지 장악해 '제왕적 대통령'이 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2005년 11월 도입한 규정이다. 다만 당헌 제87조에서는 '대통령선거 기간에는 대통령 후보자가 필요한 범위 내에서 당무 전반에 관한 모든 권한을 우선하여 가진다'고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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