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 디자인 철학이 빛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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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 31면

구스타프 스티클리(1858~1942). 미국의 근대미술공예운동(art & crafts movement)을 이끈 인물, 산업혁명 이후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는 현실을 비판하며 수공업 형태로 만든 가구의 재현을 통해 공예의 개념을 회복시킨 현대 디자인의 개척자.
스티클리를 모르는 분이라면 위 설명으로 한 인물의 존재를 연상해 보기 바란다. 우리가 지금 보는 심플한 가구 디자인의 원류가 스티클리의 업적이라 생각해도 무리 없을 것이다. 현대 디자인을 이야기할 때 그를 빼놓는다면 큰 공백이 생긴다. 스티클리를 안다는 것은 현대 문화의 흐름을 파악하려는 구체적 노력이기도 하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J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대단한 의자를 발견했으니 꼭 한번 찾아보라는 어조는 평소의 느릿한 말투와 다른 흥분이었다. 그의 말이라면 102% 신뢰하는 내가 호기심을 감출 리 없다. 서둘러 초코파이 CF를 감독한 이홍석의 작업실 겸 갤러리인 파주 헤이리 ‘더 베이 갤러리’를 찾았다.
스티클리의 매력에 빠진 한 컬렉터의 노력으로 말로만 듣던 스티클리의 실체를 처음 맞닥뜨린 감흥은 대단했다. 여러 종류의 앤티크 가구 가운데 사전 설명 없이도 단번에 스티클리의 작품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 강직한 인상의 직선 몇 개만으로 이루어진 그의 의자는 100년의 시간을 뛰어넘고도 바로 만든 것처럼 참신했다. 세월의 오염만 제거한다면 현대의 모던한 의자라 착각했을 것이다.
오크(oak)의 특징적인 결과 질감, 노란빛이 도는 색채,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짜 맞춘 기법, 광택이 살아 있는 가죽의 생생함까지…. 범상치 않은 인간의 흔적이 가장 단순한 형태로 완성된 모습이다. 예술가구의 대중화에 앞선 선구자 스티클리의 화신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이제 내 앞에 놓여 있다.
염치 불구하고 스티클리의 의자에 앉아 보았다. 쿠션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 각 진 의자는 안락하진 않았지만 불편하지도 않았다.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자 등받이에 닿는 허리 느낌이 직립 자세의 안정감을 연장시킨 듯했다. 늘어뜨린 팔은 자연스레 팔걸이에 닿는다. 단순하면서 생활의 쓰임새에 맞아야 한다는 그의 디자인 철학은 인간공학의 관점에서도 모자람이 없다.
스티클리가 직접 만든 가구는 자신이 사용하려고 만든 초기의 몇 개가 전부다. 이후 그의 이름을 붙인 가구들이 상업적으로 생산됐다. 하지만 그가 생각한 좋은 가구의 조건, 즉 단순한 형태와 튼튼한 구조를 지닌 아름다운 물건이어야 한다는 디자인 철학은 여전히 살아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스티클리의 존재가 부각되고 있다. 첨단 지향의 소비 형태에서 빗겨난 대안 혹은 진정한 아름다움의 확인 때문이랄까. 안목 있는 컬렉터와 생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고급 사용자가 관심 갖는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 이번에 소개한 스티클리 의자는 갤러리 전시품 가운데 가장 내 마음에 든 물건이다. 지름신이 강림하려는 조짐을 느낀다. 이번엔 오디오가 아니라 스티클리 의자다. 아는 것이 때론 깊은 병이 된다.

윤광준의 생활 명품 이야기-구스타프 스티클리 의자


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 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 마니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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