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레터] '저작권 기증' 그 뜻은 좋지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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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지난 5일 오후 서울 정동 이화여고 도서관에서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책따세)’주최로 ‘1저자 1저작권 공개 출범식’이 열렸습니다. ‘1저자 1저작권 공개 운동’이란 저자 한 명이 자신의 저서 중 한 권을 전자책 형태로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하는 운동입니다. “저자가 자신의 저술이 일정 부분 사회 공유 자산임을 동의해 공개하는 문화 운동”이란 게 허병두 책따세 대표(숭문고 교사)의 설명이었습니다.

우선 10권의 책이 공개됐습니다. 책따세 홈페이지(www.readread.or.kr)에 들어가면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성석제 지음, 강), 『한비야의 중국견문록』(한비야 지음, 푸른숲) 등 10권의 전자책을 공짜로 읽을 수 있습니다. 공개 도서는 다음달부터 매주 1권 추가될 계획이랍니다.

주최 측은 “한국 발 전지구적 문화운동”이라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출범식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자신의 대표작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저작권을 공개하겠다고 밝힌 시인 정희성씨의 고백이 그 답답함을 더했습니다. 그는 “내 시가 인터넷에 돌아다닌 후 인쇄된 책은 잘 팔리지 않는다”며 “저작권협회에서 불법 사례를 적발해 벌금으로 물어다 주는 돈이 인세 수입보다 더 많다”고 털어놨습니다.

이게 엄연한 우리 출판 현실입니다. 저작권이 아직은 ‘공개’의 대상이라기보다 ‘보호’의 대상인 게지요. 저작권 공개가 선행으로 강조된다면, 불법복제에 대한 죄의식도 흐려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개운찮은 또 다른 이유는 저작권을 공개해 달라는 책따세의 제안에 저자와 출판사가 느꼈을 법한 부담 때문입니다. 책따세는 정기적으로 추천도서목록을 내놓습니다. 그것이 일선 중·고교 독서 지도의 가이드가 되고 있는 게 현실이고요. 목록에 오른 책이 곧잘 스테디셀러가 되기에 신경을 쓰는 출판사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출판사로서는, 나아가 저자들로선 ‘성의표시’라도 해야 할 압력을 느끼지 않을까요.

오이 밭에선 신발끈을 고쳐 매지 말라고 했습니다. “문화 권력이 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고자 한다”는 책따세가 순수한 사회운동을 벌이려면, 추천도서 선정과 저작권 공개운동 중 어느 하나에선 손을 떼야 하지 않을는지요.

기꺼이 저작권을 내놓은 저자들과 출판사들에는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이벤트가 꼭 범출판계의 운동으로 확산돼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작권 공개가 아름다운 기부라면, 저작권 고수 역시 떳떳한 권리니까요.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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