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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연의패션리포트] 패션과 예술의 행복한 어깨동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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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1. 아티스트 마이클 린이 창조한 타이베이 루이뷔통 매장
2. 세인트 마틴 대학생들이 만든 디스플레이
3. 다카시 무라카미의 체리 블러섬 루이뷔통 백
4.마크 제이콥스<左>와 아티스트 다카시 무라카미<右>

높은 줄만 알았던 미술관의 담이 허물어진 걸까. 패션이 미술관 안으로 들어왔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현대 미술관(MOCA, Museum of Contemporary Art, LA)에서 열리고 있는 아티스트 다카시 무라카미의 특별 회고전(2008년 2월 11일까지)은 보통의 미술 전시와는 남다르다. 무라카미가 루이뷔통과 일궈냈던 패션과 아트의 만남을 재조명하고 축하하는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급기야 예술작품만 전시되던 미술관 안에는 루이뷔통의 단독 매장까지 들어섰다.

100여 년 전부터 최근까지 늘 같은 모습이었던 루이뷔통의 모노그램 백이 어느 샌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모노그램은 창업주의 아들인 조르주아 뷔통이 아르누보에다 당시 유행하던 일본의 꽃문양을 섞어 루이뷔통의 이니셜인 ‘LV’를 새겨 넣어 만들었다. 1998년 마크 제이콥스가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되면서 모노그램 백은 회춘이라도 하듯 새롭게 일어선다. 30대 초반에 유명 럭셔리 브랜드의 지휘봉을 맡게 된 뉴욕 출신의 제이콥스는 기발한 발상을 내놓았다. 100년 묵은 백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기 위해 다카시 무라카미라는 일본 아티스트를 떠올린 것이다. “무라카미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강한 힘을 느꼈다. 그는 루이뷔통의 아이디어를, 나는 그의 작업을 존중했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념비적이고 전혀 새로운 제품을 만들자고 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예술계와 패션계는 서로 굉장히 다른 것이라 여겨졌다. 우리는 그런 선입견을 바꾸고, 예술과 패션을 융합해 사람들이 사랑하는 제품, 전혀 새로운 어떤 세계를 만들어 냈다.” 마크 제이콥스는 무라카미의 회고전을 축하하는 인터뷰에서 패션과 아트의 만남을 이뤄 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강조했다.

아트와 패션의 만남은 패션의 역사 속에서 적잖게 이루어져 왔다. 패션 디자이너들은 만 레이, 르네 마그리트, 달리, 마티스 등의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영감을 받아 의상을 발표하고 트렌드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도는 예술에 대한 패션계의 일방적인 선망일 뿐이었다. 이와 같은 소극적 경향에 새로운 물꼬를 트고 방향을 제시한 것이 바로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였다. 루이뷔통과 무라카미가 공동으로 창조해 낸 무라카미 백은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이후 시즌을 거듭해 갈수록 새로운 버전의 ‘아트 컬래버레이션’이 한층 적극적으로 시도됐다. 루이뷔통은 무라카미와의 작업 이전에 이미 뉴욕 그래피티 미술가인 스티븐 스프라우스와의 협업으로 아트 컬래버레이션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뜨거운 반응을 감지했다. 무라카미 이후에는 설치 미술가이자 저명한 무대미술 감독인 로버트 윌슨에게 세계 루이뷔통 매장의 크리스마스 디스플레이를 맡기기도 했다. 또 몇 해 전 런던의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서 ‘The Weather Project’라는 작품(하루 종일 거대한 인공 해를 만들어 놓고 감상하도록 했다)으로 화제가 됐던 덴마크 출신의 설치 미술가 올라프 엘리아슨(Olafur Eliasson)에게는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루이뷔통 매장의 중앙 엘리베이터를 색다르게 고치도록 부탁하기도 했다. 엘리아슨은 “이 엘리베이터는 속으로 어떠한 빛도 들어오지 않게 설계되어 있으며 20초간 느껴지는 절대적인 ‘무아지경’은 무중력 상태에서 하늘을 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라고 했다.

올 크리스마스 루이뷔통 매장에는 보다 젊고 재기발랄한 대학생들의 작품까지 등장할 예정이다. 런던의 세인트 센트럴 마틴 대학에서 그래픽 디자인과 학사과정 2학년인 크리스토퍼 로슨과 마르코스 비얄바가 그 행운의 주인공. 올 초부터 이 학교 학생들이 출품한 64개의 프로젝트 중 최종 선정된 것이다. ‘위도 48.913/경도 02.286’이라 이름 붙은 이 작품은 인공위성 지도를 통해 루이뷔통 역사박물관의 위치를 등고선 도형으로 표현해 낸 작품이다.

이렇게 제품, 매장 연출, 스토어 건축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분야의 아티스트들과 적극적인 협업을 펼치고 있는 루이뷔통의 성공적인 결과는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었다. 두 세계가 만나면 보다 흥미로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선례도 됐다. 무라카미의 체리가 알알이 박힌 루이뷔통 백(사진3)이 수많은 여자들의 손에 들려지고, 연극 무대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유명한 미술감독의 손길이 패션 스토어에 스며들어 예술작품 같은 매장이 연출됐다. 이후 국내외 패션 브랜드들 사이에서는 아티스트와의 협업이 유행처럼 급속히 번져 나갔다. 그러나 때때로 일부 패션 브랜드에서 전개하는 아트 컬래버레이션은 단발성 이벤트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패션 브랜드와 아티스트의 협업이 성공하려면 그 브랜드의 정체성과 이미지에 과연 어떤 아티스트의 작품 세계가 맞는지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리서치가 선행돼야 한다. 브랜드에 대한 아티스트의 존중과 애정이 없으면 ‘패션과 아트’ 두 세계의 만남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많이 낮아졌다고는 해도 예술 세계의 벽은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높다. 창조적인 예술 세계를 보다 대중들에게 쉽고 흥미롭게 전달해 주는 다리가 되어 주면서, 또한 서로간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융합해 보다 새로운 즐거움을 소비자에게 선물할 수 있다면 패션과 아트의 만남은 언제까지고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강주연 패션잡지 엘르 수석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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