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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新세기 新질서 창간기념 대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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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中央日報는 창간 29주년을 맞아 한국.일본 두나라의 대표적 지성(知性)이어령(李御寧)前문화부장관(60.문학)과 하가 도오루(芳賀徹)동경대 명예교수(63.비교문학)를 11일 서울 호텔신라로 초청,「신세기.신질서」를 주제로한 특별 대 담을 마련했다.대담은 21세기를 이끌 탈(脫)이데올로기 시대의 새로운 문명 패러다임을 조망하면서 부상하고 있는 태평양시대에서의 韓.中.日 3국의 역할과 바람직한 동북아 문화권 정립을 모색해 보았다. 〈진행=21세기를 맞는 오늘의 세계는 정치 이데올로기나 국가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바뀌고 새로운 질서 패러다임을 정립하기 위한 카오스 상태에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우선 새로운 세계질서 패러다임을 문명론적 관점에서 조망해주시 기 바랍니다.〉 ▲하가=20세기말은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엄청난 변혁에서 보았듯이 지금까지 세계의 반쪽을 지배해왔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완전히 실패해 와해되었습니다.인류 역사상 하나의 사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이처럼 출발점부터 종말까지의 과정을 확실히 보여준 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포스트 이데올로기의 세계에 있어서 나타나고 있는 매우위험한 현상은 각 민족의 문화.종교.지리.풍속등에 깊숙히 관여해 있는「원리주의」의 대립입니다.이것이 민족주의와 결합될 때는더욱 위험한 상태가 될 것입니다.원리주의자는 다른 쪽을 볼 수있는 관용의 정신이 없습니다.
▲李=냉전의 이데올로기가 붕괴됨으로써 대결에서 승리한 자본주의마저 방황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하가=그렇습니다.이데올로기의 붕괴이후 이를 대신하는 무언가가 아직 출현하지않고 있는 공백기라 할 수 있겠지요.
▲李=그렇다고 해서 과거 이데올로기에 의해 눌려왔던 것들이 보스니아나 르완다처럼 민족전.종교전으로 계속 분출된다면 큰일입니다.믿을 것이 피밖에 없다면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3천가까운 민족이 3천개로 쪼개질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지금까지 우리가 믿고 있었던 인권.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같은 서구(西歐)모델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그래서 정치.경제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움직여온 냉전시대와는 달리 21세 기는 문명 문화의 패러다임으로 읽게되는 시대가 온다는 거지요.
▲하가=그렇다면 동아시아,특히 일본이나 한국은 제기능을 상실하고 있는 서양모델을 무작정 따라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非관용적 원리주의를 택한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되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고 볼 수 있겠죠.
▲李=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에 바로 그 해답이 있을 수도 있지요.서구와 非서구문명(이슬람문화권)이 충돌하는 시대에서 그것을화합으로 이끌어갈수 있는 중간문명은 아무래도 한국과 일본 같이야구와 씨름(스모)에 동시에 열광하는 혼합형 문명모델이 아닐까싶습니다.그리고 韓.日 두 나라는 서구국가들보다 반도체를 비롯한 일렉트로닉스 산업이 활발하다는 점입니다.즉 정보화시대를 이끌어 나가는 중심권역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하가=그렇게 되면 정보의 권역내에 들어간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간의 격차는 점점 심화될 위험성도 생길 것 같은데요.
▲李=그러나 컴퓨터는 점점 가전제품처럼 누구나 쉽게 다룰 수있게 발전되어 갈 것입니다.
▲하가=이 세상에 문제가 없는게 어디 있나요.(웃음) ▲李=통신네트워크로 1대1,그리고 쌍방향의 의사소통이 증대되면 자연히 민간의 힘(Civilian Power)이 커지게 될 것입니다.지난 3백년동안 절대시 해온 국민국가의 권력체체가 약화되어가서 군사.외교등 분야를 제외한 다른 분야 는 거의 민간인의 손으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경제는 벌써 다국적기업등 보더리스시대를 맞고 있는데 다음은 문화가 그 뒤를 잇게될 것입니다.그래서 지금까지 지배적이었던 친체제.반체제의 구분이 아니라 이제는비체제적인 사고의 틀이 민간파 워의 주도적인 힘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시스템에서 네트워크로 세계의 권력이 이동하게 될 것이고 국가관계도 이익충돌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휴머니즘을 바탕으로한 협력 관계로 옮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가=가장 단적인 예로 환경문제를 들 수 있겠죠.브라질의 열대수림이 개발에 의해 점점 없어져가면서 세계의 환경에 엄청난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그런데 국가대 국가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게 된다면 내정간섭이 돼 전쟁으로까지 발 전할 수도 있을 겁니다.그러나 민간의 힘이 이런 문제를 견제하고 나선다면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겠지요.
새로운 시대에는 획일적인 출근시간도,유니폼도 모두 사라질 것같습니다.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아이덴티티(正體性)를 이루는 뭔가가 없다면 모두가 개개인으로 나눠져 곤란해질 것입니다.체제속에서 몰개성화 되었던 지금까지의 고민과는 정반대 의 고민이 생길 가능성도 있을 겁니다.
▲李=어느 문명이든 그 진로는 공(公)에서 사(私)로 흘러왔지요.시계를 보세요.처음에는 공중의 장소에서 여러사람이 보는 시계탑이었지만 그것이 차츰 집으로,방으로,드디어 개인의 팔목으로 옮겨오지 않았습니까.컴퓨터도 공공용에서 개인용 컴퓨터로 주류가 바뀌고 있어요.그래서 앞으로의 산업을 팔목 산업(Wrist Industry)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어요.시계처럼 모든정보원을 팔목에 차고 다니는 시대가 곧 온다는 거지요.그럴때 개인은 타인과의 대면소통을 그리워하 게 됩니다.그래서 팔목 산업은 당연히 심성 산업(Mind Industry)을 요구하게 될겁니다.감동이 상품이 되는 세계말입니다.
▲하가=아무리 개인화 되더라도 동창회같은 인간미 물씬 풍기는가족적인 아이덴티티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李=인포메이션이니 인텔리전스니하는 영어에는 마음이란 뜻이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그러나 이것을 한자어로 번역하면 정보(情報)가 됩니다.즉 정(情)이라는 마음이 들어있지 않습니까.정보사회가 가야 할 방향은 바로 정을 소통하는데 두어 야 합니다.
21세기에는 실업(實業)이 예술처럼 정업(情業).심업(心業)이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하가=과연 그렇군요.일본서는 그것을「나사케(情け)」라 하지요.「나사케나이」는 「한심하다」,즉 「정이 없는 인포메이션은 한심하다」는 말이 되겠군요(웃음).진실한 의미의 정보화 사회는동아시아에서 꽃필 것입니다.
▲李=정보기기를 보면 전화처럼 수화와 송화를 할 수 있는 쌍방향으로 되어있잖아요.정은 오갈때 생기는 것처럼 정보시대를 주도하는 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상호관계(인터액티브)를 중시하는문화권에서 성장될 수가 있어요.또 정보성은 언제 나 노이즈(소음)와 섞여 있다는데 그 특징이 있지요.서양사람들은 두터운 벽을 치고 외부의 노이즈를 막고 살지만 한국인과 일본인은 창호지미닫이 하나로 벌레소리.새소리를 들으며 살아왔지요.심지어 귀에들리지 않는 눈소리까지도 방안에서 들었지요.「사락사락」이니「펑펑」이니 하는 눈내리는 소리는 서양사전에는 없습니다.
▲하가=그렇군요.일본에서도 「신 신」이라 하지요.그런데 동아시아인의 이러한 섬세함이 정보화.하이테크화된 사회속에서 계속 유지될 것인가가 의문입니다.말하자면 정보(情報)의 「情」이 없어지고 「報」만 남는게 아닐까요.
***半島性은 완충역할 ▲李=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위해서 동아시아의 새 문명모델을 만들어야 하지요.전화를 거는 것을 봐도 미국과 한국애들은 달라요.우리 애들은 전화로 실컷 말하고 나서도 『야 자세한 건 이따가 만나서 하고…』라고 합니다.인간의 살결냄새 를 지우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동아시아인의 심성이지요.
▲하가=21세기의 정보화 사회에서 수많은 정보를 통해 세계인의 온갖 사고를 접할 때 관용의 정신이 없다면 진실한 의미의 정보화가 불가능합니다.
▲李=한국의 기층문화라고 할 수 있는 샤머니즘을 보면 조왕님(부엌신)께 고사를 지낼 때도 조왕님만이 아니라 관계가 없는 다른 잡신들까지도 모두 불러 먹입니다.유일신과 달리 범신의 근본에 있는 것은 관용성이지요.
▲하가=일본인은 어쩌면 원리주의나 이데올로기와는 가장 인연이먼 민족일지 모릅니다.유입된 수많은 종교조차도 나름대로 적당히융합해 자신들의 형편에 맞는 실용적인 종교로 변모시켰지요.
〈진행=이제 화제를 바꿔 韓.中.日등 동아시아 3국이 21세기 태평양시대를 위해 수행해야할 바람직한 역할에 대해 말씀을 나눠 주시지요.〉 ▲李=저는 해양과 대륙의 완충적인 역할을 하는 반도성(半島性)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주택을 예로 들면,한국의 주택은 북방문화와 남방문화가 한 쪽으로 치우침없이 적절한 균형을이루고 있습니다.온돌은 북방문화이며 대청마루는 완전한 남방문화지요.이처럼 균형잡힌 사상을 반도성이라 부르고 싶습 니다.
▲하가=일본의 해양성과 중국의 대륙성이 적절히 결합된 형태가반도성이란데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그런데 일본에도 반도성이 있고 중국에도 반도성이 있으며 대륙성이나 해양성과 같은 각자의 특성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있다고 생각합니다.따라 서 동아시아의균형은 각자의 특성이 반도성에 의해 적절히 융화될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되겠지요.만일 이 반도성이 없다면 대륙과 해양이 직접부딪치는 충돌이 발생할게 뻔합니다.
▲李=한국이나 일본의 습관을 보면 테이블 위에 컵 하나를 놓더라도 접시밑에 반드시 쿠션을 깔지요.이것이 바로 반도성입니다.충돌을 완충시키는 역할을 하는게 바로 반도성이지요.
〈진행=그런 의미에서 한반도의 통일은 특별한 의미를 가질 것같은데….〉 ▲하가=물론이죠.해양과 대륙의 충돌을 완충시키는 중간성.반도성을 더욱 공고히하기 위해서라도 한반도의 통일은 꼭필요합니다.
▲李=한반도의 통일은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21세기의 주역이 될 동아시아 전체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지요.
〈진행=그러면 마지막으로 21세기 신질서 패러다임 정립을 위해 韓.中.日3국은 어떠한 관계를 맺어나가야 하리라고 보시는지요.〉 ▲하가=일본은 소극적인 과거 청산만이 아니라 실제로 한국이나 중국에서 한 일을 잘못한 것은 반성하고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은 키워가야지요.
***韓半島통일 꼭 필요 ▲李=에도(江戶) 때의 학자가운데는임진왜란을 잘했다고 옹호한 本居宣長이 있었는가하면 그 잘못을 나무란 上田秋成도 있었어요.韓日관계에서도 이제는 획일적 평가를좀더 섬세하고 깊이있게 다루어가야할 것입니다.그리고 서구문화와는 다른 수천년동안 내려온 韓.中.日의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하기 위해서 이 세나라 지식인들이 함께 모여 문화회의를 열고 풍속이나 상징사전등을 공동 편찬하는 것과 같은 창조적 작업을 해야할 것입니다.경제 기술 협력을 가능케하는 기반은 바로 이 같은 동북아시아 문화의 자기 확인작업으로 굳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가=일본도 책임이 큽니다.일본은 가장 적절한 시기에 뭔가 상징적인 이벤트를 만들어내는데 서투른 나라입니다.마침 내년이면 종전 50주년이고 몇년후면 서기 2000년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때를 기해 동아시아의 발전을 위한 의미있는 이벤트를만들었으면 합니다.
〈진행=감사합니다.일본서까지 저희 신문 창간 대담을 위해 와주신 하가선생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정리=金國振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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