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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이타르-타스 통신 기자가 본 북한] 上. 변화바람 부는 평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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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사의 데니스 두브로닌 특파원이 3년간의 평양 취재를 마감하고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에게서 평양에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과 북한 핵문제를 북한 사람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들어 보았다. 그의 기고문을 2회로 나누어 싣는다.

최근 3년간 평양에선 중요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우선 일본자동차의 수가 증가했고, 밤에 불을 밝힌 도심 지역도 늘어나고 있다. 말끔해진 건물도 많아졌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질적 변화다. 도심에 시장이 출현했고 소규모 상점들도 수없이 생겨났다. 고위 관료들만의 전용물이라지만 휴대전화도 등장했다. 역시 제한적이지만 인터넷도 개통됐다.

평양에는 현재 식료품.담배.술.의류.전자제품 등을 판매하는 시장이 10여개 있다. 북한 화폐인 원으로 거래를 하는 합법 시장이다. 이 시장들은 대부분 눈에 쉽게 띄지 않는 주택가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도 이용할 수 있는 '통일 거리'라는 시장이 생겨난 것은 지난해 9월이다. 길이가 1백m에 이르는 식료품 판매코너가 5열로 늘어서 있다. 의류.신발 코너, 전자제품 코너가 각각 2열, 한약재 코너가 1열씩 자리잡고 있다. 지붕이 덮인 시장 전체가 가게들로 꽉 들어찼으며 물건도 풍부한 편이다. 휴일이면 쇼핑을 나온 시민들로 이 시장은 발디딜 틈이 없다.

시장의 물건값은 내.외국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쌀 1kg 1백50원, 감자 1kg 60원, 돼지고기 1kg이 6백원 등에 팔린다. 의류와 신발은 수천~수만원을 호가한다. TV.DVD 플레이어 등 전자제품은 10만원까지 올라간다. 현재 일반 북한 노동자 월급은 2천5백~3천원 수준이다.

물건값을 흥정할 순 있지만 에누리 폭이 크지는 않다. 통일 시장엔 현지 주민 못지 않게 외국인들도 자주 찾는다. 상인들은 외국인들을 돈많은 고객으로 생각할 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거대한 시장 주위엔 주차장도 생겼다. 시장 서쪽편에 위치한 주차장에 차를 대기 위해선 50원을 내야 한다. 시장 동쪽편엔 10원씩 받고 자전거와 상인들의 손수레를 맡아주는 곳도 있다. 시장 안에선 지난해 12월부터 달러 대신 공식 외화로 통용되는 유로화를 공식 환율보다 다섯배 이상 높은 환율로 바꿔주는 환전소도 있다.

2년 전만 해도 평양에는 불과 몇십 개의 소규모 상점이 영업했을 뿐이다. 더구나 이런 소규모 상점에서 파는 물건은 국수와 광천수 등이 고작이었으며, 아이스크림은 명절 때나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시 전체에 수많은 소규모 상점이 생겨났다. 판매하는 상품들도 다양하다. 쌀.국수.야채.과일.냉동음료.중국산 의류 등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상점들은 보통 대규모 국영매장이나 상업단지 안에 들어서 있다. 간판도 국영 상점처럼 위장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점은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 사영업자들이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건값도 국영상점 가격보다 3~4배 높다.

지난해 5월 평양 시내에 휴대전화가 등장했다. 그러나 아직 일반 주민들은 물론 외교관들도 휴대전화 사용은 불가능하다. 무선통신이 가능한 지역도 아직 4개의 기지국이 설치된 평양에만 한정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 정부는 조만간 평양과 개성.남포를 잇는 도로를 따라 새로운 기지국을 설치할 계획이다. 이들 도시 내에도 기지국이 만들어질 전망이다.

지난 여름 평양 시내 동쪽에 인터넷 카페가 최초로 문을 열었다. 그러나 비싼 사용료(시간당 10달러) 때문에 이용객이 거의 없어 얼마 뒤 문을 닫고 말았다. 한편 북한 지도부는 2000년부터 인터넷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을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에게 e-메일 주소를 알려주며 인터넷을 통해 자주 연락하자고 제안했다는 후문이다. 평양 주재 외국 외교관들은 올해 1월에야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전화 모뎀을 통해 연결되는 인터넷 요금은 월 3백유로나 한다. 물론 사용 시간이 무제한이긴 하다.

북한에서 시장경제로의 대규모 개혁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기엔 아직 이르다. 그러나 분명 변화의 징후는 포착되기 시작했으며 시장경제 메커니즘의 일부가 시민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정리=모스크바 유철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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