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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종혁시시각각

차라리 솔직하기라도 했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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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정치 재개를 선언한다는 뉴스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동안 “올 대선은 너무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수정하겠다. 대선 40여 일, 진짜 드라마는 이제 시작인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대통령 선거는 항상 극적이었다. 1992년 선거는 김영삼 후보가 없어져야 할 집단이라고 비난하던 군사정권과 손잡고 치렀다. 97년엔 김대중 후보가 평생의 적이던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한 몸이 됐다. 2002년엔 인권 변호사 노무현이 재벌 2세 정몽준과 ‘여론조사 단일화’라는 기상천외한 일을 벌였다. 올해 선거는 더 재미있다. 이 전 총재는 지난 두 차례 대선 때 돌출 변수 때문에 당했다. 이번 선거에선 그 스스로가 돌출 변수가 됐다. 욕하면서 배우는 게 정치란 말이 그르지 않은 모양이다.

개인적으론 이 전 총재가 억울할 게 많다고 본다. 97년의 대선 패배는 본인 책임이 컸다. 두 자녀의 병역 면제는 국민에게 커다란 실망을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2년 대선 때는 권력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정황이 많다. 김대업이라는 병역 브로커가 ‘의인’으로 등장해 거짓말투성이 폭로극을 펼쳤다. 이 전 총재의 부인 한인옥씨가 10억원을 받았다는 따위의 발표를 여당이 공개적으로 했는데 알고 보니 허위였다. 그때 민주당 출입기자로 현장을 지켜봤는데, 진보와 개혁을 떠들던 당시의 집권세력은 국민 전체를 상대로 이런 거짓말을 했던 데 대해 양심의 가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이 전 총재의 입장에선 피를 토하고 싶을 수 있다. 그런 공작 정치가 없었다면 대통령은 노무현이 아니라 이회창이 됐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걸 모두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출마가 옳지 않다고 본다. 한국 정치 전체가 발전하는 게 개인의 한풀이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번 지적됐지만 간단히 정리해 보자.

①만일 대선에 출마하고 싶었다면 이 전 총재는 한나라당 경선에 참여했어야 한다. 본인이 이인제씨를 어떻게 비판했었는지 한 번 돌이켜 보시라. 게다가 조상의 묘소까지 ‘군왕이 나온다’는 명당 자리로 옮겼다는데 좀 어이가 없다.

②이명박 후보가 낙마할 가능성이 있다는 출마 이유를 댔는데, 이런 부끄러운 명분을 어떻게 입에 올릴 수 있는가. 마치 남이 안 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 같다.

③한나라당의 대북 정책이 불안하다는데 노무현 정부의 쩔쩔매는 대북 태도가 맘에 안 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때려잡자 공산당’ 식의 정책은 국제정세의 흐름에, 또 시대정신에 안 맞는다는 걸 이 전 총재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라고 본다.

④무엇보다 이 전 총재가 상징하는 ‘원칙’에 맞지 않는다. 이런 식의 정치 재개가 원칙에 맞는다고 주장하는 건 궤변일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 그냥 권력욕 아닌가.

그래서 이 전 총재에게 부탁드린다. 차라리 솔직하시라. 억지명분을 들이대지 말고, “내가 억울해서 꼭 한번 대통령 해 봐야겠다”고 말씀하시라. “아무리 이명박·정동영을 봐도 내가 더 똑똑하고 나은 것 같아서 국민의 심판을 받고 싶다”고, 그렇게 고백하는 게 낫겠다.

그런 다음 유권자들의 판단을 기다리자. 국민이 “이회창이 너무 억울하다. 그가 대통령 되는 게 역사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국민의 선택은 무조건 옳다는 따위의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민의 결정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이런 식의 정치가 언제까지 계속돼야 하느냐’고 한탄할 수 있다. 하지만 김영삼·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까지 정치자금법 다 지키고, 거짓말 안 하고 된 분은 없는 것도 현실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 그동안 이 전 총재를 현실 정치의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제 가해자의 입장에 선 이상 그런 평가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다.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