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랑>그래도 가을은 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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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난 여름 생각만하면 저절로 고개가 흔들어진다.오죽했으면 뱀들마저 산꼭대기로 피서를 갔을까.어떤 사람이 데이트 신청이 들어왔는데 거절을 했다고 했다.평소에 연애 지상주의자라 왜요? 했더니 그의 대답은 이 여름에 스타일 구기게 무슨 데이트냐고,찬바람이 불면 옷도 좋게 입고 할거라고.그말을 들을 때 나는 속으로 찬바람이 불면?했다.지난 여름을 나는 동안은 내 생전에가을같은 건 올것 같지가 않았기에.
어제 일요일.모처럼 북한산으로 나가봤다.지난 사월 이사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구기동쪽 북한산은 그저 내 아침 산책로였는데,이젠 멀어져 모처럼 마음먹은 길이었다.
소롯한 길로 접어들수록 세상에!감탄사가 절로 나왔다.바위틈으로 흘러내리는 투명한 물빛.가볍게 깃을 치고 저기로 날아가는 산새.아직도 여름인줄 알고 반팔을 입은 내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고 벌써 바람결에 돌배나무 떡갈나무 잎들 마르는 냄새가 코에스쳤다.그 나뭇잎들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은 또 어떻고.
지난 여름내내 가을같은건 절대 올것 같지 않더니 그래도 가을은 왔다.그 폭서를 뚫고 돌을 지냈을법한 아이가 아빠를 쫓아 엉기적거리며 산을 오르는걸 바위턱에 걸터앉아 바라보는데 쪽빛하늘이 서늘하게 이마에 내려앉는다.지난 여름내내 더 워서 못살겠다고 한번도 웃지 않는 동안에도 김장용 배추들은 땅속에 뿌리를내리고,어린 나무들은 성장해 가지를 하나 더 키워내놓았다.여름나기 힘들었던 사람일수록 가을이 더 와 버리기 전에 한번은 산에 오를 일이다.아직은 만물이 톡톡 여물기 직전,초가을의 산빛에 서면 뻑뻑소리나던 일상이 한걸음 물러서준다.미워지려던 그 사람도 가엾어진다.
릴케던가.이제 집이 없는 사람들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방황을 하게 될 것이라는 시구절이 떠올라 존재의 쓸쓸함도 되짚어지고,때로 원망스럽게 느껴지던 곁의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웃을 여유도챙겨주며,생각만으로도 고개를 젓게 하던 지난 여 름까지도 아쉬워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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