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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셋 아빠 김병지의 열혈 육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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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카리스마 넘치는 플레이로 K리그를 지키는 노익장 골키퍼 김병지. 그라운드에서는 강한 선수지만 가정에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자상한 아빠다. 아이들 놀이부터 교육까지 직접 챙기는 자상한 아빠인 것.

얼마 전 셋째 아들 태산이가 태어난 후 더 바쁘게 지내는 김병지의 행복한 일상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취재 민은실 기자, 사진 임익순 기자


경기도 구리에 위치한 김병지 선수의 집에 도착했을 때, 엘리베이터 앞에서 쓰레기 분리 수거하는 그와 마주쳤다. 그라운드에서의 카리스마는 간데없다. 의외로 다정다감한 그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발소리를 낮춰 달라며 애교 섞인 부탁을 했다.
“태산이가 좀 전에 잠들었어요. 어젯밤에 잠을 설치더니 이제야 푹 잠이 들었네요.”

최고령 골키퍼, 역대 최다 출장, ‘신기록 메이커’인 김병지 선수는 요즘 K-리그 경기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시합이 끝난 다음 날이라 피로가 가시지 않았을 텐데도 그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모처럼 만의 휴식이지만 그는 오늘 같은 날이 더 바쁘다. 아침 일찍 태백(9)이와 산(6)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오전에는 두 달 된 태산이와 시간을 보낸다. 우유를 먹이고 동화책을 읽어 주는 아빠. 산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태백이 하교할 시간에 맞춰 함께 학교로 간다. 세 부자가 공원에서 축구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어느덧 저녁 시간. 아내와 차 한 잔 마시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달콤한 휴일이 어느새 훌쩍 지나간다.

“아이들이랑 이렇게 놀아주는 것도 일주일에 한두 번인 걸요. 아내는 매일 그렇게 지내잖아요. 더구나 요즘은 태산이가 있어서 아내가 더 힘들어해요(웃음).”

기저귀 갈고 책 읽어 주고, 드럼도 함께 배우는 아빠의 일상… 두 아들도 축구 마니아다. 태백이는 부양초등학교 축구부에서 맹훈련 중이고, 산이는 KBS TV ‘해피선데이-날아라 슛돌이’의 2기 멤버로 뛰고 있다.

“아이들이 아직까지는 축구를 참 좋아해요. 소질도 있어 보이고요. 앞으로 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기쁘게 시켜야지요. 태산이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아이들 중 한 명은 축구 선수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는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축구공 모빌을 사온 극성 아빠다. 집 안에는 로봇이나 자동차 장난감보다 가지각색 축구공이 더 많다. 두 아들 모두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함께 공을 찼다. 축구 선수의 객관적인 안목으로 아이들을 볼 때 태백이는 골키퍼, 산이는 공격수가 됐으면 좋겠단다.

“축구라는 공통분모가 있어서인지 아이들과 더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함께 즐기고, 또 건강하게 크는 모습을 볼 수 있어 행복해요.”
서울에서 2시간 거리에서 아빠의 시합이 있는 날은 무조건 온 가족이 응원하러 간다. 그러나 이기는 날이 있으면 지는 날도 있는 법. 매 경기 최선을 다하지만 남편이 패전하게 되는 날은 아내 김수연씨(37)도 마음이 무겁다.

“이번 대구 경기에서 FC서울이 1:0으로 져서 플레이오프행이 좌절됐어요. 그 결과로 인해 많은 남편의 계획이 얼마나 많이 무너졌는지 몰라요. 제가 속상해하면 남편이 더 부담스러워할까봐 내색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내버려 두는 편이에요.”
슈퍼맨 아빠 김병지는 세 아들을 보면 다시금 에너지가 충전된다. 좌절과 시련이 있어도 조용히 곁을 지켜주는 아내를 보며 용기를 얻는다.

아이들 교육은 대부분 그가 맡고 있다. 아내는 섬유공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 오히려 운동선수 남편의 외조를 받고 있는 격이다. 그녀는 남편을 “가족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사람”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한글이나 수학 등 특별히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다. 책을 많이 읽어 주기는 했지만 한글 학습지를 따로 시킨 적은 없다. 기특하게도 태백이와 산이는 스스로 한글을 깨우쳤다. 공부보다 ‘배우는 과정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그의 교육 철학. 요즘 그는 큰아들과 드럼을 배우고 있다. 운동 이외에 함께 즐길거리를 찾다가 배우기로 결심했다.

며칠전 산이의 생일날 온가족이 축하의 자리를 마련했다.

“출퇴근 시간이 정해진 직장인이라면 정기적으로 레슨을 받을 텐데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못 가요. 그래도 태백이랑 같이 레슨 받고 연습하니까 재미있던데요(웃음). 산이랑 태산이도 나중에 원하는 악기를 배우게 되면 가족 연주를 해보려고요.”

아이들 경제 교육도 아빠 몫이다. ‘슛돌이’ 방송 활동으로 출연료를 받는 산이의 통장에는 잔고가 꽤나 두둑하게 들어 있다. 아이들과 은행에 갈 때 각자 통장을 가지고 가 저금하도록 한다. 매달 5만원의 용돈을 주는데 태산이는 용돈 기입장을 꼼꼼하게 쓰고 있다.

아내보다 더 세심한 베테랑 아빠의 육아법… 태어난 지 두 달 조금 넘은 태산이는 경기장에서 태교를 했다. 일명 축구 태교. 그래서인지 세 아들 중 태동이 가장 활발했다.

“태백이랑 산이도 남편의 얼굴 요모조모를 닮았는데 태산이가 가장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저희 시어머니 말씀으로는 남편 어렸을 때랑 판박이라고 하더라고요.”

두달된 태산이를 제일 세심하게 챙겨주는 산이.

외동 아이 키우기도 힘든 세상에 아이 셋을 키우는 건 만만찮은 일이다. 더구나 6년 동안 막내로 지낸 산이가 동생이 생기면 질투가 많아질 거라며 주변에서 걱정을 하기도 했다. 부부는 태백이와 산이의 마음이 다치지 않고, 형제 간의 우애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 셋째를 임신했을 때부터 아이들을 세심하게 배려했다.

“저희는 세 번 다 가족 분만을 했어요. 태백이 탯줄은 제가 끊고, 산이 탯줄은 태백이가, 태산이 것은 산이가 끊었어요. 분만하기 전에 이번에 동생 탯줄은 누가 자를 거니, 라고 미리 물어봤더니 산이가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산이가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아이들에게는 진한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아이에게 책임감을 심어 주려고 한 것이다. 그는 태백이와 함께 있을 땐 ‘태백이가 더 좋더라’, 산이랑 있을 때는 ‘산이가 제일 좋아’라고 말해 준다. 그래서인지 두 형은 시샘 한번 안 내고 태산이를 무척 아낀다. 태산이가 밤에 잠투정을 하면 산이가 제일 먼저 달려간다.

“아이를 둘이나 키워 봤으니 셋째는 수월하더라고요. 예전에 태백이 낳고 아내가 산후 우울증이 심했는데 그땐 저도 잘 몰라서 ‘당신만 애를 낳느냐’고 핀잔을 줬어요. 그런데 한 명, 두 명 키워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요즘엔 내가 많이 도와주니까 좋지?(웃음)”
아내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 베테랑 아빠이긴 한가 보다. 인터뷰 중 태산이가 깨어나서 보채자 그는 주방으로 갔다. 능숙한 솜씨로 우유를 타는 아빠. 경기가 끝나고 아무리 피곤해도 새벽이면 일어나 아내와 번갈아 우유를 먹인다. 피곤한데도 새벽마다 아내를 도와주는 것은 지극한 아내 사랑 때문이기도 하다.

여전히 연애하듯 살아가는 닭살 부부…

인터뷰 전날이 아내의 생일이었다. 평소에도 문자를 자주 주고받는 부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합니다’라는 닭살 문자는 그녀에게 최고의 선물이다. 그녀도 남편이 합숙 훈련을 하러 가면 ‘집 걱정 마시고 열심히 하다 오세요’라고 따뜻한 마음을 전한다. 그는 훈련하러 갈 때 아내에게 짤막한 편지를 남겨 놓는 로맨티스트. 연애 5년, 결혼 10년 차 부부인데도 여전히 소중하게 사랑을 가꿔 가고 있는 듯했다.

“아내와 대화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경기장에서 순간 순간 느꼈던 감정, 아이들 키우면서 고민이 되는 교육 문제, 아내의 작품 이야기, 우리가 꿈꾸는 미래까지 할 얘기가 너무 많아요.”

가끔 아내는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라고 묻는다. 그러나 그의 답은 명쾌하다. 그때보다 지금이 좋고,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고. ‘신기록의 사나이’라는 별명은 최선을 다해 선수 생활을 해온 그에게 찬사와도 같다.

“기록은 단기간에 되는 게 아니에요. ‘최연소 선수’는 스타트에서 세운 기록이고, 한 번만 가능하잖아요. 무실점, 최장 출장 같은 기록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죠.”
‘처음처럼, 지금처럼’이 삶의 목표라는 김병지. 그는 인생의 한 단계, 한 단계를 성실하게마무리하고 또 시작하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함께 푸른 잔디에서 축구를 할 수 있는 세 아들과 남편의 은퇴에 맞춰 작품 전시회를 하겠다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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