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3분기 경제(GDP) 3.9% 성장의 이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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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 21면

버냉키 FRB 의장 [블룸버그 뉴스]

미국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지기 시작했던 1991년 초.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은 기준금리 인하를 검토하면서 “경제 현상들이 서로 다른 얘기를 속삭이고 있다”고 푸념했다.

예상치 웃돌았지만 내용은 부실

그로부터 약 16년이 흐른 2007년 현재 벤 버냉키 FRB 의장도 지난주 금리 추가 인하를 앞두고 비슷한 생각을 했을 법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본격화한 지난 3분기 중 경제(GDP)성장률 잠정치가 3.9%(연율 환산)에 달한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확정치로는 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일단 월스트리트의 예상치(3.2%)를 크게 웃돈 것이었다. 더욱이 1분기(0.6%)와 2분기(3.8%)보다도 높은 수치였다.

백악관 쪽은 즐거워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인 에드워드 래지어는 “아주 놀라운 성과”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3분기 성장의 질(내용)을 잘 따져보면 마냥 즐거워할 수만도 없다”고 말했다.

■심상찮은 내수=미국 상무부가 지난주 내놓은 3분기 경제성장 통계를 살펴보면 내수가 3%(전 분기 대비) 늘어 2분기(1.4%) 때를 크게 앞질렀다. 3분기 성장률 3.9% 중 2%포인트가 소비 증가 덕분이었다. 서브프라임 사태로 한창 요란했던 그 기간에 소비가 이 정도 늘었다는 게 놀라울 뿐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소비가 휴가철인 7월에 집중적으로 늘어났고, 서브프라임 사태가 본격화한 8월과 9월에는 증가세가 둔화됐다. 게다가 4분기가 시작되는 10월의 체인점 판매는 전달보다 0.3%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지표는 전체 소비의 선행지표 격이다. 4분기 내수가 시원찮을 것임을 시사한다.

물론 4분기에는 크리스마스 등 연말 쇼핑 시즌이 끼어 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집값 상승을 믿고 씀씀이를 키웠던 예전처럼 올 연말에 쇼핑을 즐길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급등하고 있는 기름값도 미국인의 소비를 가로막을 요인으로 꼽힌다.

■불길한 투자 감소=투자도 별로 늘지 않았다. 전 분기와 견줘 지난 2분기에는 4.6% 늘었던 것이, 3분기에는 0.9% 증가하는 데 그쳤다. 기업 투자가 크게 늘어 주택건설 투자의 급감(20%)을 상쇄시켰다. 그런데 투자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기업들의 재고 확대가 대부분이었다. 만약 재고가 줄지 않으면 기업들은 생산을 감축할 가능성이 크다.

올 4분기 기업투자도 밝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서브프라임 사태로 금융회사들의 손실이 급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대형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구입이 줄어들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IBM 등 IT업체들이 이미 실적 둔화를 예고하고 나설 정도다. 일반 기업들의 실적도 크든 작든 서브프라임 사태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만큼 투자가 시원찮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는 일자리가 기대만큼 늘어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미 자산운용사인 노던 트러스트의 이코노미스트인 애셔 뱅걸로는 “앞으로 집값이 더 떨어질 가능성이 커 금융회사 등 관련 기업의 실적이 예상보다 더 나빠질 수 있다”며 “부진한 내수와 투자가 4분기 이후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남은 버팀목 수출=미 달러 약세로 미 수출 기업들은 1985년 플라자합의(인위적 달러 약세 유도) 이후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전 분기 대비 3분기 수출이 16.2%나 늘어났다. 수출은 3분기 성장률(3.9%) 가운데 1%포인트를 차지했다. 앞서 2분기에는 수출이 7.5% 증가했다. 중국 등 아시아 경제가 아직은 탄탄하고 이들 지역 통화 가치가 달러와 견줘 오르고 있어 미 수출 증가세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이라크 주둔비 등 때문에 미 연방정부 재정지출도 꾸준히 늘어 3분기 성장에 기여했다. 미군이 이라크에서 당장 철수할 가능성이 작아 연방정부 지출은 당분간 줄어들지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최근 주정부들이 세수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해 재정축소를 잇따라 발표하고 있다. 연방정부 지출 증가의 효과가 반감할 가능성이 엿보인다.

■4분기 1.5% 성장?=신용평가회사 S&P, 투자은행 모건스탠리, 자산운용사 노던 트러스트 등은 속속 4분기 성장 예상치를 내놓고 있다. 1.1~1.5% 수준이다. 월스트리트의 이코노미스트들도 대부분 1.5% 정도로 예측하고 있다. 이들은 수출이 현재 추세대로 계속 늘어나 1%포인트 정도 성장을 이끌어 주고, 투자·내수·재정지출 쪽에서 합해 0.5%포인트 정도 성장에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내년 1분기 경제 성장률은 1% 정도에 그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전망대로라면 미 경제는 앞으로 2분기 연속 잠재성장률(2.5~2.7%) 수준을 밑돈다. 침체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원유값이 90달러를 넘어 100달러를 바라보고 있다. 3분기 중 시간당 평균 임금은 전년 동기와 비교해 3.98% 상승했다. 앞으로 비용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어우러지면서 스태그플레이션이 추악한 얼굴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버냉키 풋(Put)=지난 91년 그린스펀은 서로 다른 경제현상에 고민하다 기준 금리를 천천히 내렸다. 그 결과 경기 침체를 불러왔고, 거센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버냉키는 엇갈린 경제현상에도 불구하고 9월과 10월 연속 금리인하 처방(버냉키 풋)을 썼다. FRB성명서에서 밝혔듯이 버냉키는 “인플레와 경기하락 가능성이 엇비슷할 것”으로 보면서도 일단 경기 방어 쪽을 선택한 것이다. 아무래도 경기침체에 더 민감할 수 밖에 없는 국민을 의식한 흔적도 엿보인다. 하지만 앞으로 추가 금리인하는 신중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두 차례의 금리인하가 슬슬 인플레를 부채질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버냉키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지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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