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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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떠난 자와 남는 자(4) 두 사람은 고서방의 숙인 머리를 내려다 보았다.혼잣말처럼 고서방이 웅얼거렸다. 『어느 놈이든 하나가 혼쭐났다 하면 바로 소문이 날 텐데,그렇게 되면 다른 놈은 제 똥밑이 구려서라도 제발로 기어나올 테고 그러면 그걸로 일은 쉽게 끝이 날 수도 있는 거여.그런데그렇지 않을 경우가 두가지가 있으니까 걱정이지.』 『두 가지라니?』 『생각해 보게.그놈들이 어떤 놈들인가.왜놈밑에서 불알 긁어주며 누룽지라도 하나 더 얻어먹자고 하던 놈들인데,조선사람들이 작당을 해서 자기네를 치러온다 하는 걸 알아 봐.십중팔구나는 아니오 하고 줄행랑을 놓으면서 사타구니 밑으로 개꼬리 서리듯 하는 놈들이 있을 테고 그도 아니면,때는 이때다 하고 왜놈들 등에 업고 우릴 잡으러 달려들 건 뻔한 일 아닌가 말이여.』 고서방이 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일을 섣불리 건드리다가는 오히려 큰일은 우리가 뒤집어 쓸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자는 거여.논두렁 끄슬리려다가산불내서 조상묘 홀라당 태워 먹는다는 게 바로 그걸 두고 하는말이여.』 『그렇다면 하나씩 잡아족치기로 하지.』 태성이가 결심하듯 말했다.
『누구를 첫놈으로 잡느냐만 남은 셈이야.』 『덕봉이가 만만할수도 있지만… 그런 놈 속이 더 알아보기 힘든 거여,바로 그런작자가 오히려 이쪽 사정 저쪽 사정을 훤히 뚫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장씨가 말했다.
『처음에 잡는 놈은 태길이로 하자.마침 그놈이랑은 내가 요즘한조니까 어쩌다 생긴 일로 잡아 꿇리기도 안성맞춤이고.만약 일이 잘못된다 해도 멱살잡이 한번 했던 걸로 넘길 수도 있는 거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고서방이 먼저 일어섰다.그는 방파제 저편의 경비원이 섰던 자리를 흘끗 돌아보고 나서 말했다.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그 새삐 말이지,대관절 뭐해 처먹던 위인이래?』 『알 게 뭐여.부모 얼굴도 모른다고도 하고,제 말로 각설이 짓도 했다고 떠벌려대는 걸 보면 고생깨나 한 모양인데,요즘에 어느 놈이 부모 덕보고 살았다던가.그렇고 그런 놈이겠지.』 『여기서야 소시적에 고생했소 하는 게 옛날에 나 금송아지 매고 살았소 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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