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관리 경직이 부도 불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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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길을 한번 잘못든 통화관리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지난달의 어음부도율 통계는 잘 말해주고 있다.은행의 자금을 갑자기 채권으로 묶는 낡은 통화관리 강화 방식의 불똥이 순식간에 중소기업으로 튀면서 8월의 부도율을「李-張사건 이후 최고」 로 치솟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통화당국은 뒤늦게 중소기업용 추석자금으로 1조원을 풀겠다는 등 사후 진화에 나섰지만,이미 쓰러진기업들은 억울하기 짝이 없고 되살릴 방법도 없다.이는 서울의 8월 부도율이 0.12%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 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결과이기도 했다.
12년전 같은 돌발변수도 없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동안 통화당국의 부도율에 대한 설명은 녹음기를 틀듯 같은 내용이었다.
실명제 이후 가계수표 부도가 워낙 많았고 경쟁력이 없는 한계기업들이 쓰러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8월의 경우는 7월 말일(31일)이 일요일이어서 7월에 포함돼야했을 부도가 넘어온 몫도 가세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통화관리는 정상적이었다는 점을 전제로하는것이다.과연 8월의 통화관리가 제대로된 것이었을까.
재무부나 韓銀내에서조차 제기되고 있는 비판적인 시각은 8월 통화관리가 지나치게 경직적인 것이었다는 반성이다.
지난달 7일의 支準마감을 전후해 韓銀이 갑자기 통화관리를 강화하면서 금융시장에는 일대 혼란이 일었었다.
물가를 잡기 위해 돈줄을 다소 죄어야할 필요성에야 이견이 없었다. 문제는 방법이었다.금융시장에 구조적인 문제들이 널려 있는데 통화량에만 집착해 단기간에 돈줄을 바짝 죄어버리다보니 그동안 통화 증가율에 신경쓰지 않고 자금을 굴려온 은행들에 비상이 걸렸다.
한바탕 支準을 쌓느라 곤욕을 치른 은행들은 대출창구를 닫아걸다시피 했고 결국 불똥이 가계와 중소기업으로 튄 것이다.그 와중에 멀쩡한 중소기업까지 자금회전이 막혀 쓰러지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8월의 후유증은 9월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통화관리강화에 놀란 은행들은 돈을 콜자금등 단기로만 굴리려할뿐 가계나중소기업 대출은 여전히 꺼리고 있다.이대로 가다가는 추석 고비를 넘기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결국 2조원의 추가 자금지원을 이끌어 낸 셈이다.
아무튼 韓銀은 금융기관 총액대출한도 증액등을 통해 중소기업에1조원 규모의 추석자금을 추가 공급하는등 추석자금으로 4조원을풀고 추석후 환수에 나서 이달중으로는 평잔기준으로 3조원안팎의총통화()를 공급,증가율을 14%안팎으로 유 지하겠다고 밝혔다. 당초 추석자금으로 3조원을 풀고 공급은 2조5천억원선으로 맞추려던계획을 바꾼 것이다.
물가불안과 통화관리 사이의 함수관계를 솜씨있게 풀어나가는 통화당국의 능력이 어느때보다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이 값비싼 대가를 치른 지금 남아있는 교훈이다.
또 그같은 정책의 조화 이전에 금융개방과 외환규제완화등이 진전되어 더 이상 국내의 통화량 조절이 의미를 찾지 못하는 시기가 벌써 닥쳐오고 있는 데도 예나 지금이나 어느날 갑자기 은행돈을 긁어모으는 식의 통화관리를 고집하고 있는 중앙은행의 사고방식부터 바뀌어야한다는 반성이 심각하게 일고 있다.
〈李在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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